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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26. 2022

결말은 시작의 다른 이름일 뿐

모두의 이야기

 “그래서, 그날 다들 화해는 했고?”

 두 달 만에 제주국제공항에서 만난 삼촌의 첫 질문이었다. 차를 타고 공무원으로 가는 길에 지난 두 달 간의 일을 설명해 드렸다. 삼촌은 조수석에서 리치망고 주스를 홀짝이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 목 사장의 이야기가 촉발한 불꽃이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를 활활 불태운 순간을, 해가 뜰 때까지 아무도 잠들지 못하고 이야기에 이야기를 거듭한 이야기를 이야기했다. 

 “삼촌은 다 알고 있었던 거죠?”

 외계 행성 같은 새별오름을 옆구리에 끼고 달리며 나는 투덜거렸다.

 “그래서, 힘드냐?”

 “재미있어요, 아주.”

 “보내준 원고 보면 다 느껴지지. 지금 공무원에 누가 남아 있지?”

 “더 늘었죠, 사람이.”


 6월로 넘어가면서 공무원 게스트하우스에 두 명의 전직 스텝이 찾아왔다. 곧 종영을 앞둔 예능의 마지막 녹화를 마친 무와 새 앨범을 구상 중인 원이었다. 그들은 공을 만나자마자 우산을 집어던지고 서로 얼싸안았다. 애월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이직해 정식 스텝이 된 브로콜리가 먼지 한 점 없는 객실로 손님들을 안내했다. 치우고 치워도 엉망인 거실을 보고 한숨을 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실은 원고와 사진과 각종 자료들, 간식 봉지, 빈 병으로 어지러웠다. 이곳에서 나는 해원과 목 사장과 공과 주인과 브로콜리의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글을 수정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교차 검증하는 작업에 열중했다. 큰 흐름은 최대한 맞추되 조금씩 어긋나는 부분들은 그냥 두었다. 가령 회인과 해원이 처음 만난 순간을 목 사장과 해원은 서로 다르게 설명했다.  내 판단으로 목천천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이 인상적이라 그 부분을 살리고, 목 사장의 설명을 굳이 삭제하지 않았다. 공과 해원이 각자의 첫 만남을 다르게 진술하는 것도 그냥 두었다. 사실상 해원이 의식적으로 공을 기억하지 못하는 쪽이지만. 각자의 평행우주가 공존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에. 무엇보다 곧 책으로 완성될 이 글은 사실적인 기록이 아닌, 상상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다. 두 번째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가 소설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해원은 반복해서 강조했고 모두가 동의했다.


 “그럼 나는 그 소설 속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나?”

 “삼촌은....다시 돌아오는 사람이죠. 소설의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영원회귀?”

 “영원회귀가 그런 개념이 아닐 텐데?”

 삼촌의 웃음소리에 나도 따라 웃었다. 

 “죄송해요, 어제 그 삼촌 대학 다닐 때 별명이었다는 그 책 읽다 잠들었는데, 딱 세 장 읽었는데.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확실히 그 책이 절 곤경에 빠뜨렸거든요.” 

 “아, 나도 오랜만에 생각이 나네. 책이 공무원에 있나?”

 “에티카에서 빌렸어요.”


 에티카의 주인은 목천의 회인에 빠르게 몰입했고 그날 밤 자신이 만났던 회인의 뜻을 이어 지금의 해원을 도와 책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 물론 주인은 ‘목천 회인’과 ‘그날 밤의 회인’과 ‘해원’을 철저히 분리해 받아들였다. 책방 에티카의 바깥채를 굳게 봉인한 자물쇠를 열고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제 1판의 48권을 공개했고, 주인의 K쯤 되는 지인이 운영하는 인쇄소를 연결해 주고, 회인이 읽었던 책들을 아낌없이 빌려 주었다. 우리가 처음 에티카를 방문했을 때 찾아왔던 여행 유튜버가 업로드한 책방 에티카 비난 영상이 동정 여론을 유발하여 오히려 화제의 장소로 부상했다. 그걸 본 무의 제안으로 공과 원 셋이서 유튜브 계정을 개설하여 <공무원 게스트하우스> 외전을 제작해 업로드할 계획을 세웠다. 


 “아주 가벼우면서도 묵직한 계획들이구먼.”

 공무원으로 향하는 삼촌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해 마중 나온 목 사장과 포옹하고 옆에서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해원과 악수를 하면서 삼촌은 내내 밝은 얼굴이었다.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나야말로 이제야 만나게 되어서 내가 너무 무심했다. 송구해.”

 “괜찮습니다.”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네.”

 어리둥절한 해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삼촌은 말했다. 

 “책을 만든다는 아이디어, 아주 마음에 들어.”

 삼촌은 얼굴이 빨개진 해원을 뒤로 하고 목 사장과 함께 잔디 정원을 한 바퀴 돌았다. 느린 걸음으로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뒤뜰의 귤나무를 보러 가서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해원과 소 목수의 벤치에 앉아 각자 생각에 빠져 있었다.


 “왜 제목이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인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해원이 불쑥 물었다.

 “첫날 한 번 말했던 것 같은데.”

 “그때랑 똑같아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 중간에도 썼지만, 처음 이 프로젝트를 맡으며 의아했던 ‘소설’과 ‘일기’의 난이도는 체감상 직접 글을 써 보니 허구와 상상으로 재창조되는 이야기가 더 쓰기 편했다. 나는 상승과 하강 이론을 근거로 해원에게 설명했다.

 “일기는 우울해지기 쉬워요. 자기비하에 빠지거나 좌절하기 쉬운 글이라 하강 흐름을 탈 수 있어요. 소설은 상승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상승하는 이야기를 써야 해요. 우리 모두 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끝맺음되는.”

 해원이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역시, 저는 복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특히 인복.”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해원의 뒤로 이곳에서 보낸 두 달 간의 장면들이 스크린샷처럼 펼쳐졌다. 잔디밭에서 기타를 치는 원과 이를 바라보는 공과 그 옆에서 책을 읽는 주인의 모습, 가부좌를 틀고 앉아 노래를 듣는지 명상을 하는지 모를 목 사장의 머리를 환하게 비추는 햇빛, 부엌에서 브로콜리와 무가 땅콩 머핀을 만들며 끝나지 않을 수다를 이어갔던 어느 오후, 원의 노랫소리와 땅콩 머핀의 냄새가 제주의 강렬한 햇빛에 뒤섞여 공무원 구석구석에 스며든 시간들.

 “고마워요, 장원 씨.”

 “고마운 건 제 쪽입니다. 제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앞으로도 글을 쓰실 건가요?”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이 책이 제가 쓰는 처음이자 마지막 소설이 되겠죠. 저는 1024개의 다른 나를 만들 정도로 상상력도 배짱도 없어요.”

 이 프로젝트가 일단락되면 삼촌과 진지한 대화를 길게 나눈 뒤 회사를 나올 생각이었다. 무슨 일을 할지 구체적으로 정한 건 없지만, 뭔가를 ‘하고 싶다’는 힘이 내 안에 차 있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해원 씨는요.”

 “네, 말씀하세요.”

 “만약 회인 씨가 글이 아닌 다른 창작 활동을 했다면, 저기 원과 같이 음악을 했거나 어머니처럼 목공을 했거나 하면, 다른 형태의 ‘일기’가 나왔을까요?”

 해원은 오른손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음악 앨범 형태의 ‘일기’나 가구로 만들어진 ‘일기’도 불가능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다른 우주의 해원과 회인이 열심히 만들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어떻게든 소설을 썼을 거예요. 회인이 노래를 만들었다면 그 노래에 대한 소설을, 그림을 그렸다면 그림을 주제로 한 소설을 얼마든지 썼을 거예요. 저는 써야 할 소설이 아직, 아주, 많이, 남아 있어요.”

 3장 해원의 이야기 초고에서 해원이 추억하는 ‘소 여사’에 대한 이야기가 두 장 반 정도 길게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나중에 목 사장의 이야기를 들은 뒤 해원은 그 부분을 빼달라고 요구했다. ‘이’ 책에서 중요한 소 목수는 10장에 있고 ‘내 어머니’는 다른 책으로 깊게 써야 한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화는 다 가라앉았고?”

 어느새 벤치로 다가온 목 사장이 불쑥 끼어들었다. 해원은 보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삼촌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외출하고 돌아온 공이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한숨부터 쉬었다. 

 “아직도 둘 사이에 해결이 안 된 게 남았어?”

 “내버려 둬. 지금 해원이 여기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거야.”


 그날 해원이 제대로 들기도 힘든 항아리를 깨부술 정도로 분노했던 일의 전말을 목 사장이 다시 말해 주었다. 내가 정원에서 주인의 독백극을 관람하는 동안 해원이 방 침대 위에 올려놓은 내 노트북을, 노트북 배경화면에서 활짝 웃고 있는 삼촌을 보았고, 찰나의 깨달음에 충격 받은 해원이 목 사장을 들이받았다. 책이 사라지고 있다는 메일을 보낸 사람과, 책이 사라지도록 주인을 부추긴 사람과, 삼촌의 회사에 책 집필을 의뢰하며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재정립할 중립적인 인간을 제주에 불러들인 사람은 한 명이었다. 3명이 할 일을 목 사장은 혼자 해냈고 원래 그는 5인분의 일쯤은 가뿐히 해내던 사람이었다. 

 “화가 났겠지, 내가 솔직하게 밝히지 않고 자꾸만 일을 벌인다고. 과거에도, 지금도 내가 꾸미는 일 때문에 자신의 과업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한 거지.”

 3년 전 5월 해원이 회인의 책을 들고 제주에 내려왔을 때도 지금과 비슷했다. 해원이 정말로 그때 보여 준 글을 포함해 책으로 만든 사실을 알게 된 사장은 해원을 초대했다. 해원 역시 사장이 1년 만에 제주도에 소 목수를 위한 안식의 집을 완성한 사실에 놀랐다. 해원은 자신의 양어머니가 묻힌 뒤뜰의 귤나무에 물을 뿌리며 이제 자신의 추도식을 시작할 준비를 했다. 


 어지러운 내 심정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목 사장은 갑자기 내 어깨를 두 번 크게 두드렸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다니까.”

 “칭찬이죠?”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정리할 사람은 자기뿐이야.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그 아이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할 화자로 적합해.”

 “객관적이라 말하기에는 내가 지나치게 드러난 것 같은데...”

 글을 쓰며 나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나의 감정에 자주 놀랐다. 특히나 나는 해원과 생각 이상으로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그에게 감정이입을 지나치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궁금했다. 해원에 대한 모든 것이.

 “나는 궁금해요...”

 거실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해원의 모습을 따라가며 무심코 말했다. 말하다 멈추었다. 회인의 생각이 궁금하다고 말하려다 표현의 불충분함을 깨닫고 말을 잘랐다. 회인이, 목천천을 홀로 걷던 그 사람의 생각이 궁금한지, 의도가 궁금한지, 그 사람 자체가 궁금한지 궁금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를 직접 만났던 해원과 목 사장과 공이 묘사하는 그는 묘한 부분에서 어긋나고 그 어긋난 틈새에 진짜 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왜 말을 하다 말아.”

 목 사장의 말에 옆에서 휴대폰을 확인하던 공이 픽 웃었다.

 “그거야말로 내가 고모한테 항상 하고 싶던 말인데.”

 “나는 할 말은 다 해.”

 “‘다’하지는 않지.” 갑자기 고개를 들고 공은 나를 바라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되게 대단해 보이는 기술 하나 알려 드릴까요? 내가 아는 걸 전부 말하지 말라, 그리고 내가 모르는 것도 말하지 말라.”

 공은 잔디밭에 누군가 내려놓고 간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원본 책을 집어 들어 페이지를 펼쳤다. 내게 보여 준 부분은 「인정하는 부분인 것입니다」의 후반부였다.

 ‘나는 내가 보여주기 나름인 걸.’

 “<화장실 전쟁> 다음으로 이걸 꼭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데.”

 “「당신만의 드라마」가 아니라?”

 “그건 만들기가 까다로워서, 1024개의 자아를 어떻게 표현하지? 앞선 영화들이 성공한 뒤에 투자 좀 받아야지 했죠.”


 책방 에티카에서 회인의 책 일부를 옮겨 온 뒤로 공무원 여기저기에 책이 굴러다녔다. 대화 도중 가까이에 있는 책을 펼쳐 인용문으로 대신하는 방법이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브로콜리는 꼭 화장실 청소를 하러 가는 길에 「화장실 전쟁」의 대목인 ‘화장실이야말로 인간의 타고난 본능을 감추는 위선적인 장소니까!’를 외쳤다. 무는 「당신만의 드라마」를 따라 지금까지 연극 무대와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연기했던 역할들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했다. 주인은 책방이 유명해지고 손님이 배로 늘면서 책방다운 에티카 운영을 고민하다 「기다리는 택배는 오지 않는다」의 첫 문장을 따서 ‘인생택배’라는 이름의 책 택배 서비스를 구상했다. 이런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 공과 원이 편집했다. 영상 속 우리의 모습은 모종의 목적을 위해 모여든 공동체의 느슨한 결속이 느껴지는가 하면 각자 할 일에 열중하느라 산만하게 보이기도 했다. 

 “만약 <공무원> 외전이 잘 풀리면 후속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요?”

 “단편영화라도 찍어 봐야겠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전 그 애의 부탁을 이행할 겁니다.”

 공은 갑자기 내게 바짝 다가앉아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우리 중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사람이 누구일 것 같아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땅콩머핀을 가득 쌓은 쟁반을 들고 해원이 다가왔다. 그 뒤에서 브로콜리가 커피 주전자와 잔들을 받쳐 들고 따라왔다. 공은 해원을 스치듯 바라보다 빠르게 시선을 돌려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공모자의 미소를 남기고 땅콩머핀을 집어 들었다. 머핀은 표현이 어려울 정도로 고소한 맛이었고 커피는 완벽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어요.”

 그때서야 긴장한 브로콜리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공식적으로 공무원의 청소기와 세탁기와 오븐을 독차지하게 된 그는 하루 세 번 건물 모든 곳의 먼지를 제거하고 매일 수건을 빨고 쉴 새 없이 커피와 빵을 만들었다. 공의 시나리오에 일일이 코멘트를 달고 무의 개그에 반응하고 원의 노래를 경청했다. 브로콜리는 회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도 이번 책에 한 자리 차지할 권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본명을 그대로 쓰면 보통명사인 사람과 헷갈릴 수 있다고 브로콜리라는 별칭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브로콜리가 편식하는 채소의 대명사지만 영양소가 풍부하고 채소답지 않은 근육질의 본체가 자신과 꼭 닮았다면서, 악성 곱슬머리인 머리카락을 흔들며 거실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커피를 따라 주었다.

 “너무 맛있어. 너무 재미있어. 방송 때보다 백배는 즐겁다니까. 이 멤버로 시즌 10까지 찍어버려도 나는 완전 오케이야.” 무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머핀을 먹었다. 

 뒤늦게 나타난 주인이 브로콜리가 건네는 커피 잔을 받아들고 내게 뭔가를 건넸다. 

 “내가 갖고 있는 건 이게 다예요.”

 머핀을 입에 털어놓고 주인이 준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폐가가 책방으로 완성돼는 과정을 담은 사진, 목천천의 목련, 낭독회가 끝난 다음 날 오전 공무원 잔디밭을 찍은 사진 등을 넘기며 나는 물었다.

 “바다에서 찍은 노을 사진은 없네요?”

 고개를 들자 주인은 벌써 잔디밭으로 나간 뒤였다. 주인도 내게 자신의 전부를 말하지 않으려나 보다. 낭독회의 밤 회인과 나누었을 대화의 전부, 목천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전부,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한 권 두 권 모아가며 꿈꾸었던 것들 중 일부는 내가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내 옆에서 나와 함께 주인의 사진을 살피는 해원 역시.


 바다앞 카페에서 처음 우연히 마주친 건 순수한 우연이었을까?

 일이 마무리되면 독일로 떠나겠다는 계획은 왜 어느 순간 없던 일이 되었을까?

 ‘회인 프로젝트’에 대해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내 질문에 해원은 전부를 답하지 않는다. 아, 그 카페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곳이라 자주 가요, 계획이 바뀌었어요, 몰랐다고 봐야죠. 대신 해원은 내가 쓴 글을 상세히 피드백하고 생각나는 것들을 쉬지 않고 말했다. 회인의 글 일곱 편의 순서를 엄격하게 통제하고 우리 각자의 이야기들을 꼼꼼히 읽는다. 사진 자료를 정리하고 글을 교정했다. 그는 두 번째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의 완성에 자신의 힘을 집중한다. 아마 내가 위의 질문들을 던진다면 해원은 웃으며 책의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을 짚어 보여줄 것이다.

 ‘결국엔 나의 진리가 당신의 진실보다 아름다울 것이기에.’

 아마 해원은 목 사장을 향한 분노를 어느 정도 풀었음에도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중이다. 

 ‘내가 너의 무덤이 될게.’

 “이 문장이 좋아요.”

 “그래요?”

 “소 여사, 엄마, 회인의 방식을 빌린다면 나의 방어머니의 임종을 사장님께서 독차지하셨죠. 이제 인정하기로 했어요. 유골을 제주에 옮기는 것도 내가 동의했고. 평생을 한 사람만의 무덤이 되겠노라 선언하는 사람은, 뭐라고 해야 하나.”

 “사장님이 해원 씨와 자신은 서로 닮았다고 했죠.”

 “내 다른 쪽 어머니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닮았죠, 닮았는데, 달라요. 나는 무덤이 아니라...”

 글의 여백에 해원은 적는다.

 ‘나는 너의 자궁이 될 거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원고가 몇 사람의 손을 거쳐 돌아왔을 때 해원은 결심했다. 내가 너를 다시 한 번 새롭게 낳을게. 책을 만들고, 뿌리고, 다시 새로운 책을 내고, 절대 잊히지 않을 네 이름을, 너의 존재를, 이 섬에서 태어나게 할 거야.


 해원에겐 오직 회인뿐이었다.     


 원이 기타를 들고 밖으로 나와 방금 주제가로 쓸 만한 노래를 만들었다며 한 번 들어달라며 부탁했다. 삼촌이 한 손에 머핀을 다른 손에 크림과 설탕을 잔뜩 넣은 커피 잔을 들고 신난다는 표정으로 따라 나왔다. 우리가 만들어낸 원 안에 원이 앉아 기타를 두드렸다.

 “이 노래는 회인의 글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노이어의 공주」에 영감을 받아 만든 것입니다.”     


소리 없이 노래할 수 있을까

언어 없이 예언할 수 있을까

노이어의 공주는 예언한다

당신은 당신의 진실을 집필하라

우리는 우리의 진리를 노래한다

우리의 진리가 당신의 진실보다 아름다우니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아름다움은 영원하리라, 반복되는 후렴구 속에서 브로콜리와 무가 일어나 춤을 추고 공과 주인이 박수로 리듬을 맞춘다. 웃으며 박수치는 삼촌 옆에서 목 사장과 해원의 시선이 슬쩍 맞닿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라본다. 해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다. 이 사람은 내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진리를 공유하고 있으니까. 다음 주면 이 원고는 인쇄되어 책으로 만들어지고, 한 달 안에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가 다시 태어났다는 소식이 퍼질 것이다. 이 책이 영원하리라란 약속을 함부로 할 순 없다. 확실하게 단정 짓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다만 내가 틀림없이 말할 수 있는 건, 이 글은 소설이라는 진실, 아니 진리이다.




<노이어의 공주>

     

 노이어 섬은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글이 있다.

 노이어의 유일한 공주는 말을 할 수 없다. 신은 공주에게 문장을 쓰는 운명을 부여했다. 그 문장은 용의 깃털로 만든 펜으로 종이에 적힌 순간 세계가 되었다. 사람들은 공주가 쓴 글을 예언이라고 불렀다. 공주의 예언을 엿보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은 배를 탔고, 노이어의 험한 바다 앞에서 모두 부서졌다. 

 그 글은 오직 나만이 읽을 수 있다. 노이어의 유일한 사서인 나만이.

 섬의 주민들은 종이를 만들고 책을 제작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나 글을 읽을 줄 몰랐다. 태풍에 휩쓸려 표류한 내가 우연히 도달한 이 섬은 그때까지 전설로 전해져 왔다. 어린 시절 잘 때가 되면 어머니가 읽어 준 [노이어 공주 이야기]를 다들 기억할 것이다. 말 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공주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의 운명을 집필하는 이야기. 바다조차 고요한 그 섬은 노이나무라는 뿌리부터 잎 하나까지 눈처럼 새하얀 나무만 자라는데 운명의 책은 그 나무로 만들어 진다고.

 사흘 간 널빤지 하나에 매달려 빗물만 받아먹다 눈앞에 나타난 새하얀 섬을 보았을 때, 나는 이제 죽었구나, 역히 사후세계는 색깔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흰 배가 나타나 나를 구조했고 공주 앞에 나를 끌고 갔다. 섬에서 가장 깊은 숲 속 성에서 공주가 소리 없이 나타나 나를 바라보았다. 땅에 닿는 은빛 머리칼, 텅 빈 종이처럼 무구한 얼굴, 바다 거품 같은 흰 드레스, 오직 눈동자만이 붉은 색이었고 종이에 무심히 떨어뜨린 핏방울처럼 한없이 붉었다.

 공주는 자신의 오른 소매를 끌어당겨 먹물을 묻힌 손가락으로 썼다.

 ‘너는 읽을 줄 아는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는 미소 지었다.

 ‘이제야 나의 독자가 도착했다.’

 내가 글자를 읽을 줄 안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나를 풀어 주고 성 옆에 거처를 만들어 주었다. 전임 독자가 서재에서 책을 꺼내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사망한 뒤로 반 년 만에 나타난 독자라고 했다. 

 “공주님의 글은 읽는 이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니까, 자네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구.”

 “왜 육지로 가서 사람을 데리고 오지 않나요?”

 “자네가 통과한 그 바다는 배를 허락하지 않아. 자네처럼 운 좋게 살아서 표류한 사람들만이 섬에 들어올 수 있어.”

 그렇게 나는 노이어 섬에 갇혀 운명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 해가 뜨면 성으로 가서 공주가 밤새 쓴 운명들을 읽는다. 내가 읽는 동안 공주는 새로운 운명을 쓴다. 쓴 것을 읽는다. 해가 지고 공주가 잠자리에 들면 읽은 운명들을 모아 공장에 가져간다. 공장에서 한 권의 책이 완성되면 궁전의 서고에 보관한다.

 독자인 나는 서고의 모든 책을 읽을 권한과 의무가 주어졌다. 틈만 나면 서고에 틀어박혀 아무 책이나 꺼내 읽었다. 그곳에 세계가 있었다. 왕국의 과거와 제국의 미래와 대륙의 현재가 전부 쓰여 있었다. 공주의 펜촉이 현재를 결정하고 미래를 암시하며 그 모든 것이 과거가 되었다. 나는 탄복했고, 두려웠고, 슬펐다. 운명이 이미 정해진 것에 감탄했고 한 번 적힌 운명은 바뀔 수 없다는 사실이 두려웠고 이 모든 걸 한 사람이 짊어진 것에 슬펐다.

 나는 공주에게 가서 공주의 왼쪽 소매에 썼다.

 ‘왜 당신이 이 일을 해야 합니까?’

 공주는 내 글을 보고, 내 얼굴을 보고, 내 눈을 보았다.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운명을 쓰는 자의 운명을 쓴 이는 누구입니까?’

 공주는 낯선 문자로 적힌 글을 바라보듯 내 문장을 바라보았다. 

 ‘그대는 그대의 의지로 이곳에 왔는가?’

 ‘파도가 절 떠밀었습니다.’

 ‘나 역시 그렇다.’

 섬에 도착한 이의 운명은 즉각 소각되고 나는 독자로서의 내 운명을 읽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감정은 미리 정해진 흐름이 아니란 뜻이다. 이 슬픔은, 공주를 향한 나의 마음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다.

 공주와 나의 눈이 마주쳤고,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펜을 가졌으나 서툰 독자인 공주의 눈은 내 마음을 읽지 못했다.

 내가 섬에 온 지 3년 째 되던 해 제국의 주도 아래 왕국과 공국이 연합하여 노이어 섬을 없애기로 모의했다. 섬을 없앨 수 있는 건 섬을 만든 붉은 용뿐이었다. 사절단은 대륙의 가장 깊은 곳에 잠든 용을 찾아가 성 하나를 채울 만큼의 황금을 바쳤다. 용은 기뻐하면서 의아해했다.

 그대들은 왜 운명을 파괴하려 하는가.

 사절단 대표는 뜨거운 용의 입김과 더 뜨거운 용의 눈길 앞에서 덜덜 떨면서 간신히 대답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합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써 나갈 자유를.”

 용은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불꽃같은 용의 웃음이 황금을 녹였고 사절단 모두 녹아내린 황금에 빠져 죽었다. 용은 날개를 펼쳐 노이어 섬으로 날아왔다. 붉은 용의 그림자가 섬을 뒤덮자 마을 사람들은 배를 타고 도망쳤고 용의 날갯짓에 파도가 일어 배를 뒤집었다. 

 용은 성의 마당에 앉아 공주와 공주 옆에 선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속일 생각은 아니겠지?

 공주는 고개를 숙여 절을 한 뒤 오른쪽 소매 안에 미리 적어둔 글을 보였다.

 ‘제 운명의 책에 당신의 이름을 적었습니다.’

 왜 그랬지?

 ‘제가 이곳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응시했다. 다른 누군가의 대답을 구하는 것처럼.

 노이어가 사라지면 앞으로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할 수 없다. 대신 각자의 진실만이 난무하며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울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진리가 있으니까요.”

 내 대답에 용은 사람 하나 크기만 한 눈을 굴려 나를 응시했다. 용의 눈동자에 나와 공주가 나란히 비쳤다.

 네가 공주를 설득했군.

 “이것이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용은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를 등에 태웠다. 용이 날아오르며 거대한 꼬리가 섬을 내리쳤고 순식간에 섬이 가라앉았다. 인간의 운명 역시 바다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용은 우리를 다른 섬에 내려놓고 자신의 안식처로 돌아갔다. 거대한 화산이 섬 가운데서 이따금씩 불꽃을 내뿜은 섬이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각자의 불꽃 속에 자신의 진실을 주장하는 이들 사이에서 우리는 비로소 쉴 수 있었다. 펜을 내려놓은 공주는 남의 글을 읽고 다른 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독자에서 해방된 나는 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이 그 결과물이다.

 이 이야기가 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결국엔 나의 진리가 당신의 진실보다 아름다울 것이기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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