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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Mar 29. 2023

은근히 취하는 술


20살이 되고나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이게 무슨 당연한 소리냐고? 법적으론 당연한 소리겠지만, 나는 그 흔한 수능 100일주도 마시지 않았고, 친구들과 학창시절에 작은 일탈로 캔맥주 하나 마셔본 일도 없다. 언제 한번 부모님이 가볍게 반주를 걸칠 때 옆에서 한 모금도 채 안되는 한 방울만 마셨을 때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써서 술에 대한 환상이 전혀 없었다.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내 몫의 한 잔이 내 앞에 놓였을 때, 여전히 너무 써서 나는 늙어도 간만큼은 싱싱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짠을 외치는 어른들이 대단해보이면서도 동시에 이해도 안됐다. 이게 뭐가 맛있다고 저렇게 마셔대는거지? '삼소(삼겹살+소주)' 라는데 삼겹살만 먹어도 충분히 맛있었고, '치맥(치킨+맥주)'이라는데 치킨 그 자체로 다른게 필요없었다.


인생이 더 쓰니까 술은 달아서 먹는다는 슬픈 우스겟소리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 어른들은 얼마나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걸까, 생각도 했다. 특히 낡은 국밥집에 혼자 앉아있는 손님의 자리에 초록색 병이 놓여있을 땐 괜히 그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얼마나 힘들면 혼자 저렇게 마실까. 알코올 냄새가 코부터 찔러 먹기도 전에 역겨움이 올라오는 깡소주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리잔에 터는 저 사람은 분명 지금 고달프고 슬플 것이라고 혼자 상상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20대 후반이 되었고 은근히 취해 집에 가기도, 엄마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은 아주 가끔 만취해서 집에 가기도 한다.

주종도 다양하다. 어느 날엔 첫 입은 목구멍을 열어 벌컥벌컥 마셔줘야 제 맛인 생맥주를, 또 다른 날엔 라거니 에일이니 여전히 뭔지 모르겠는 수제맥주를 마신다. 지갑에 출혈은 있지만 대신 그만큼의 분위기를 주는 와인을 마실 때도 있고, 그냥 왁자지껄 떠들고 싶을 때 혹은 둘이지만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 소주를 찾기도 한다. 마침 약속 날에 비가 온다면 막걸리집을 검색해서 가기도 한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술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다. 술을 잘못배웠다. 술은 무릇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다. 술을 잘 마시고 좋아하는 걸걸한 이미지가 옛날부터 뿌리 깊게 박힌 학교에 간 탓이라고 하겠다. 술 문화가 강하고 행사도 많은 학교에 진학해 비로소 처음으로 제대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소 야만적으로도 보이지만 맞은 편 사람이 술로 전사할 때까지 마시는 것이 덕목인 자리들이 내 첫 음주 생활의 시작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자리에 있는 모두가 나사 하나씩은 풀려야 비로소 참된 술자리라고 생각했다. 취하면, 그것도 아주 제대로 취해 옷만 다 갖춰입었다뿐이지 실은 서로 완전히 날 것의 상태로 마주해야 진정한 술자리고 그것이 진정한 친구가 되는 과정이라고 착각했다. 서로 비슷한 안주에 비슷한 술을 비슷하게 마셔댔으니, 다음 날 비슷한 숙취에 괴로워하며 비슷한 색의 오바이트를 하고나면, 대가는 고통스럽지만 우리가 그 전 날 분명 아주 진한 무언가를 나눈 것이라고 느꼈고, 그게 좋았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진 기억이 잘 안나지만, 분명 우린 가까워져있었기 때문에.


'간 때문이야' 라는 귀에 쏙 박히는 후크송도 한 몫했겠지만, 우루사 광고가 그토록 유명한 건 근본적으로 간기능 개선이 필요한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나도 어떤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 늙은 나의 간이 싱싱하기는 개뿔, 이대로면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망가져있겠다, 싶었다.








다행히 그런 야만적이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술자리는 대학교 3학년 중반부터 서서히 그 빈도가 줄었다. (이것도 남들보다 그 시기가 늦은 편이라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물론 그렇게 표현했지만 그 자리를 단 한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 전보다 간기능의 약화되었을지언정 나는 그보다 더 값진 시간들을 얻었다고 확신한다.) 이제 불과 몇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술을 마시고 나면 몸이 해독하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졌음을 체감하는 중이다. 사회에 하나둘씩 내던져졌던 시기엔 "마시고 죽자!"가 아니라 마시고 남몰래 한숨을 푹 쉬는 자리도 있었다. 어느 정도 그 시기를 벗어났을 때도, 지금은 마시지만 내일이 없지 않으니 적당히 마시고 여운을 남긴 채 떠나는 자리가 대부분이다.




술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우리의 이성을 족족 다 끊어놔 본능과 본능이 만나게 했던 술이 이젠 약간의 경계심만 풀어주고 그 소임을 다 한듯 떠난다. 나는 원체 신경이 예민한 사람이라 정말 가족같은 관계나 가족 아닌 이상 친한 사이도 만날 때마다 아주 얇은 빗장같은 걸 두르고 있다. 오랜만에 만났든 아니든 상관없다. 절대 싫어서가 아니라 그냥 상대가 내 앞에 없었다가 나타났으니 거기서 생기는 초반의 아주 미세한 어색함, 이 사람은 오늘 어떤가를 탐색하는 마음, 이런 것 때문이라고 생각해주길.


그래서 술이 자연스럽게 그 빗장을 스르륵 풀어줄 때의 그 느낌이 좋다.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륵 푸는 것 같은. 팽팽했던 줄이 느슨해지는 것 같은. 심장이 뛰는 속도가 쿵!쿵!쿵!에서 쿵-쿵-쿵- 으로 바뀌는 그 순간이 좋다. (아마 과학적으로도 무슨 작용 때문에 실제로 신체적인 반응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확히는 모르겠으니 패스) 그 자리의 조명, 온도, 습도- 따위의 감성적인 것들이 술로 상기된 피부 위에 살포시 느껴지는 그 찰나가 좋다.


혼자서 이런 술을 '은근하게 취하는 술'이라고 칭한다. 막 취한 것도, 그렇다고 안 마신 것도 아닌 딱 그런 은근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술. 반주, 또는 조금 더. 은근하게 취하는 술로 그 자리에서, 자기 전에 누웠을 때도, '좋다' 라는 감정이 뭉근하게 마음을 데워준다.








여전히 혼자서 술을 마시는 일은 없다. 앞에 말동무도 없는데 혼자 뚜껑을 딸 정도로 술 그 자체를 좋아하진 않는다. 여전히 술은 쓰고 맛이 없고 '굳이' '혼자서라도' 마셔서 내 간을 조금이라도 더 해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굳이' 마시면서 상대방과 갖는 시간은 놓칠 수 없다. 어쩌면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그런 시간들이 친구들과의 시간의 전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평일엔 일하고, 주말엔 집에서 쉬는 일상, 그리고 점차 몇명은 가정을 이룰 것이다. 하루종일 놀고, 밤새 놀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주말에 브런치 정도, 평일에 술 한잔 정도, 몇년 만에 가는 여행 정도, 그마저도 시간을 애써 따로 만들어야 가능한 날들이 올 것이다. 더 이상 스무살처럼 헬렐레 거리를 활보할 수 없는 나이, 짧고 굵은 만남으로 끝내야하는 나이가 되겠지.


이 사실이 슬프기도 하지만, 술자리의 기쁨이 마시는 양과 무관하듯이, 함께 보내는 시간의 기쁨도 길이와 무관하다는 것을 이제 안다. 종종 퇴근 후에 은근하게 취하는 술을 마시며 안 보이는 곳에서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있음을,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이 순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낄 수 있는,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어딘가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런 만남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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