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내게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는야 제대로 글쓰기 시작한 지 1년 된 작가지망생, 소설, 웹소설, 장르소설, 드라마, 영화, 에세이 등등 늦은 나이에 최종 꿈을 찾은 만큼 장르/종류 가리지 않고 매일매일 허리가 부서져라 글을 쓰고 있다.
"다희 너는 돈 걱정 말고, 네가 하고 싶은 일만 해."
남편의 배려로 인해 겸업은 아니고 그렇다고 뭐 '전업 작가'라 하기에도 아직은 마땅한 성과와 수입이 없어서 그냥저냥 유럽에 사는 백수 및 주부 및 작가지망생. 결혼 7년 차인 우리 부부, 딩크는 아니지만 아직은 우리의 인생을 덜 살았다는 이유로 아이를 계획하지 않아 2인 가구로 남아있다. 즉, 나에게는 나만을 위한 하루종일이 있는 셈. 시간이 많은 만큼 게을리하지 않고 웬만한 공모전에는 다 제출을 하는 편인데,
그중, 올해 6월에 제출한 제13회 교보 스토리 대상에서 소설 중장편 부문 최종심 작에 선정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최종심 발표에서 최종 수상작 발표까지는 2주의 기간이 있었고, 나는 그 기간에 괜히 걱정하거나 기대도 하지 않으려 다른 원고로, 여행으로 빡빡히 채워가면서 바쁘게 살았다.
그리고 다가온 최종심 발표날, 나는 아침부터 심장이 뛰었다. 부정맥이라도 온 듯 두근두근. 하지만 온전히 그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웹소설 계약작(2빡+리뷰본 수정)과 마감 얼마 남지 않은 장르소설 공모전으로 인해 여유롭게 쉴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
이른 오전부터 카페에 가서 일을 하고 몇 시간 뒤,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옆에는 노트북을 켜놓고 교보 홈페이지를 확인했다. 아직 발표 안 났다.
"하아···."
짙은 한숨을 쉬며 유럽에 있는 남편이랑 영상통화를 했다.
"떨어지면 뭐 어때! 이미 최종심 오른 것만으로 대단한 거야, 다희. 그게 얼마나 희박한 확률인데! 심지어 교보문고잖아!"
남편은 마치 미래를 예상하기라도 한 듯 나를 달래려 부던히 애를 썼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정맥 심장은 잠잠해질 줄을 몰랐다. 그때는 각자 영상통화용 휴대폰을 앞에 세워놓고 둘 다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안경에 비치는 무언가, 반짝거리는···.
"어···그래···뭐 어때···이미 잘했어. 잘했어."
그리고 남편의 목소리가 급 빌빌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직감했다.
아. 발표 났구나.
나 떨어졌구나.
남편과 통화하는 사이에 최종 수상작 공지가 올라온 것이었다. 그는 부러 티를 내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너무나 확연히 티가 나버렸고, 나는 그 어떤 슬픔도 보이고 싶지 않아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곧바로 내 노트북으로 확인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최종심 탈락'인지, '수상 탈락'인지 모르겠다만 어쨌든 최종심에는 오르고 수상은 탈락.
나는 울고 싶었다.
그러나 곧 병원에 실비서류를 받으러 가야 할 시간이라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켜 방으로 터덜터덜 들어갔다.
떨어졌구나.
기대했는데···
역시 떨어졌어.
마침 집에는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어디한번 울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들어간 방이 조금 더럽다는 사실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별안간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를 하다 화장대 거울 앞을 정리하는데, 잘 닦지 않아 뿌연 거울 속 내 얼굴이 보였다.
열심히 했는데···.
역시, 영 아니었던 건가···?
이제 진짜 울어보자.
눈물을 짜내며 서러움을 토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번개가 내려치듯 번쩍 떠오른 장면, 편의점 단말기에 꽂혀 있는 내 춘식이 카카오뱅크 체크카드.
···어?
내가 카드···챙겼던가?
집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제로콜라 사 왔는데, 어쩐지 내가 카드를 안 챙긴 것 같은 쎄한 느낌이었다. 얼른 거울에서 얼굴을 떼고 마저 청소를 슥삭슥삭 한 뒤 나는 급히 가방부터 뒤적거렸다. 그런데 없다. 진짜 내 춘식이 카드가···없어···!
고개를 빼꼼거리던 눈물은 쏙 자취를 감췄다. 내 춘식이···춘식···! 가방과 옷과 모든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다른 손으로는 카드 정지를 위해 카카오뱅크 앱을 켜고. 마지막으로 다시 가방으로 돌아갔다. 탈탈 털었다. 그런데 뾰옹- 하고 초록색 춘식이가 나타났다. 아니나다를까 수첩 사이에 끼어있었다.
아, 그럼 그렇지.
내가 이런 거 안 까먹는다고?
나는 안도의 숨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미소라니.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엉엉 울고 서럽게 가슴을 쳐야 마땅······
어, 시간이!
무심코 시계를 봤는데 곧 병원 문 닫을 시간이었다. 어휴, 늦으면 안 돼. 오늘 반드시 실비청구서류 받아야해. 나는 재회한 춘식이를 얼른 주머니에 찔러놓고 집을 나섰다. 정류장으로 달려가서 버스를 탔다. 병원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버스를 탄 건데, 운 좋게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아 이제 좀 슬퍼해볼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앞문으로 할머니들 우르르 탑승하시는 게 아닌가. 이거 뭐 어떡하지?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휙휙 돌리며 버스 맨 뒷머리까지 확인하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자리가 아주 많이 남았어서 결국 그대로 나는 맨 앞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뒤에도 어째서인지 계속 노약자분들이 탑승하셨고, 나는 또 두리번두리번, 움찔. 이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달하고 말았다.
마음껏 슬픔에 잠길 기회를 또 놓친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병원까지 헐레벌레 뛰어가서 무사히 실비 서류를 받았다. 이로써 오늘 내가 해야 하는 의무사항은 모두 끝이 났고, 나는 바로 집으로 가려했다. 정확히는 집이 아니고, 집 동네의 익숙한 대형 카페들에서 일을 하려 했다. 돌아가는 버스를 잡아 타려고 했는데, 문득 저 길 건너에 보이는 바다.
고향에 올 때마다 바다에 가니, 내게는 너무도 익숙한 바다인데 이날따라 어쩐지 더 푸르게 푸르게 보였다.
"바다나 좀 보자."
눈앞에 바로 집 가는 버스가 왔는데 안 타고 터덜터덜 바다로 건너 왔다. 모래 들어갈까 봐 안까지는 안 들어가고 둑 같은 자리에 앉았다. 보통 버스킹을 관람할 때, 그냥 바다를 볼 때, 바다를 보며 노맥(노상맥주)을 할 때 앉는 자리다. 나 역시 친구와 이 바다에 오면 늘 앉는 그런 자리 중 하나.
자···
그럼 이제 실컷 청승을 떨어볼까?
난 그럴 자격이···충분히 있잖아···
그러나 우선 실비 청구부터 해야 했다. 진료상세비, 약제영수증 등 가지런히 착착 모아 내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찰칵찰칵, 바다에 반사되어 비추는 어스름한 태양빛을 조명 삼아 깔끔한 보험청구 사진을 찍었다. 원래 바람 없는 날이었는데 그래도 역시 바닷가 바로 앞은 다르다고, 비린내가 살짝 섞인 선선한 바람이 앞에서부터 솔솔 불어왔다. 서류들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봐 나는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사진 촬영을 완료했다. 이어 곧장 보험 청구앱에 들어가 업로드까지 끝내고,
자 이제 드디어.
푸른 바다를 보며 슬픔에 잠기려는데,
저기, 죄송한데
사진 좀 찍어주시겠어요?
앞에서 어떤 남성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으나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끄고 있었기에 바로 들을 수 있었다. 고개를 홱 들었는데, 그의 눈은 정확히 날 향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내 양옆으로는 어느새 커플이 착석해 있었다. 고로, 나만 혼자. 바다 앞에 앉아서 실비 청구 사진을 열심히도 찍는 혼자 온 여자.
아. 내가 혼자라서.
내게 찍어달라 하시는구나.
나는 사실 사진 찍어드리는 걸 몹시 좋아한다. 유럽 여행할 때도 꼭 한 번은 찍사 역할을 하게 된다. 그때는 남편도 같이 있는데, 내가 계속 사진을 찍고 있어서 그런가? 뭐 어쨌든, 인물 사진 찍는 행위 자체를 좋아한다.
시선을 살짝 옮기며 피사체를 살폈다. 말을 거신 남성분, 뒤에 여성분, 그리고···아기···!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보자마자 내 얼굴에 피어오르는 환한 미소.
"아, 그럼요! 내려갈게요!"
모래가 들어올까 결코 내려가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딱 나의 조카 나이인 그 올망졸망 아기와 젊은 부부를 예쁘게 담아주고 싶었기에.
"아구 이쁘다! 아구~애기 이모 보고 한번 웃어주세요~"
그분들은 사실 한 장 내지 두장을 부탁하셨겠지만 카메라를 잡은 이상 최소 스무 장은 찍어야 했다. 가로 세로 다양한 포즈 동영상, 애기의 환한 미소를 포착할 때까지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용량이 부족해 촬영이 강제로 끝나버렸다.
"어···어휴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두 분은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깊이 전해주셨다. 젊은 부부 두 분도, 애기도 너무너무 아름다웠다.
그렇게 다시 착석한 뒤 샌들에 들어간 모래를 탈탈 털며 이제야 제대로 바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이유 '드라마'를 반복재생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있어야 할 슬픔이 없었다. 그저 바람이 너무 시원했다. 알싸한 바다 비린내가 참, 시원하기만 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혼자, 가만히 바다를 본 게 얼마만이지?'
자문자답을 하며 갑자기 내 블로그를 켰다. 남편과의 2021년부터의 해외살이를 쭉 훑었다. 더블린, 호주, 말레이시아, 푸껫, 핀란드, 폴란드 등등···그걸 보며 갑자기 혼자 추억에 잠겼다. 참. 우리 남편이랑 이것저것 많이도 했구나. 어릴 적 꿈이 모험가나 여행가였는데 그래도 그것만은 이루었고, 지금도 신나게 이루고 있다.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거의 두 시간을 바다를 보다가. 수첩 꺼내서 앞으로 일정 정리하고. 하반기 유럽 여행 갈 곳 정리하고···.
수첩을 탁, 덮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6시 되기 3분 전. 아, 이제 진짜 시간이 없다. 일하러 가야 했다. 내게는 세상이 두쪽 나도 지켜야 할 마감이 있으므로. 이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동시에 다시 떠오른 최종심 탈락이라는 가슴 아픈 결과.
욱신거리는 가슴, 오늘 마땅히 흘려야 할 눈물을 아직도 흘리지 못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래. 울어줘야지.
무릇 바다를 보며 울어줘야지. 한번.
순간 '길 건너 편의점에 뛰어가서 맥주를 얼른 사올까?' 고민했으나 집 가는 버스 도착까지 몇 분 안 남아서 그냥 말았다. 그리고 다시 촉촉한 감상에 젖으려 내 안의 감성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아···괜찮아. 잘했어. 최선을 다했고. 그렇지만 기대했는데···조금 슬프으···
할렐루야!
정말정말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우렁찬 외침이 귓전을 때렸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갈 것이고 사탄을 숭배하면 지옥불에 떨어질 지어니!"
알고 보니 내가 앉은자리 뒤편이, 그 팻말을 드시는 분 고정석이었던 듯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매일 6시에 출근하시는 모양이었다. 아. 차라리 버스킹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됐다! 일이나 하러 가자.
나는 쩌렁쩌렁한 그분의 대사를 뒤로 하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휙 둘러보고
버스에서는 다른 원고들 기획을 하며 갔다. 그렇게 몇 시간 카페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운동을 했다. 유산소 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여러 가지 일을 해야 되는 것 같다고.
슬퍼할 시간 따위 없다. 난 할 일이 있어. 그리고 곧 유럽 여행도 실컷 할 것이고. 물론 가끔 좀 버겁다 느껴도,
이렇게 많은 일들을 저글링하듯 굴리는 이유가 애초에 이것이었다.
이거 떨어졌어? 잘 안 돼?
괜찮아. 난 다른 게 있으니까.
이게 희한한 생각 같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정말 도움이 됐다. 그것도 아주 큰 도움. 만약 내가 당장 할 일이 없었더라면, 당장 기분 전환할 유럽여행이 없었더라면, 아마 방구석에서 뒹굴며 술이나 퍼먹지 않았을까.
탈락을 알리니, 가족들이 날 무척 안쓰럽게 보았다. 엄마와 아빠는 자꾸만 내 표정을 살피고, 조카와 함께 등장한 오빠와 새언니는 갑자기 케이크를 사 오셨다. 분명 내 것일 텐데, 내가 떨어졌다 말씀드리니 급격히 굳는 언니와 오빠의 표정. 그리고 케이크의 존재 원인은 돌연 '조카 탄생 10개월 기념'으로 탈바꿈했다. 여기에 더해, 유럽에서 내내 내 눈치를 살피는 남편까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큭?
그래.
나는 이렇게 사랑을 받고 있어.
그러니까 다 괜찮다. 다 괜찮지.
그리고 잔잔히 남아있던 아쉬움을
완전히 끝내준 엄마의 말이 있었다.
괜찮아.
계속 쓸 거잖아? 어차피.
수상은 못했으나. 나는 괜찮다.
엄마 말처럼 어차피 계속 쓸 거니까.
언젠가 또 기회가 오겠지.
그러니 그냥 지금을 살면 된다.
열심히 여행하고, 열심히 쓰고.
열심히 하자. 정말 열심히 하자.
언젠가는 반짝이는 기회가 분명 올 테니까.
그래도 일단 슬쩍 경력란에 추가는 해본다.
13회 교보 스토리대상 최종심 선정
수고했다. 나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