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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장르소설이 취향인가?

판타지 세계관을 쓸 수 있다니!

by 다롬

문학공모전이란 공모전은 단 하나도 놓칠 수 없어 캘린더에 아주 빡빡히도 적힌 데드라인들, 그것에 죽고 못살던 나는 어느 날 또 새로운 종류의 공모전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장르소설


그러니까 일단 소설은 소설인데, '장르'라는 말이 붙은 묘한 기운의 단어. 일반 소설도 거의 읽지 않는 나는 역시 이 장르소설이라는 것도 무엇인지 몰랐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매력적인 분위기에 얼핏 추측은 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정확히는 몰라 우선 검색부터 했다.



장르소설이란 정확히 무엇인가?



장르소설이란,

SF, 판타지, 호러, 추리 등 특정 장르에 기반해 대중의 흥미에 초점을 두며 쓰이는 소설



'특정 장르'에 기반해 '대중의 흥미'에 초점.



으음···.



처음 이 장르소설 공모전을 발견했을 당시 나는 '소설'과 '웹소설'을 한창 쓰던 시기였기에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그럼 장르소설은 웹소설 느낌에 더 기울어진 감이 있나?라는 게 나의 첫 번째 추측이었다. 대략적인 의심은 했지만 역시 정의만으로는 그 온전한 장르의 느낌을 파악할 수 없어 결국 '장르소설' 카테고리에 있는 책을 몇 권 읽었다. 무언가를 제대로, 빠르게 이해하기에는 예시만 한 게 또 없으니까.



아하···!



장르소설로 제법 유명한 몇 권을 읽고 나니 얼추 그림이 잡혔다. 일반 소설이라기에는 무척 톡톡 튀고, 웹소설이라 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느낌. 그러니까 소설과 웹소설의 중간에 위치한 알록달록 무지개 같은 소설이랄까. 내가 읽은 장르소설이 '판타지'배경이라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다.



장르소설에 대한 감이 잡히자 나는 더욱 힘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아. 판타지도 가능하단 말이지. 이런 거라면 이제 또 내 마음속에 방방 뛰어노는 '그' 이야기를 써보면 되겠군.



마침 그때 내게는 애매한 원고가 하나 있었다. '태양신'을 주인공으로 한 스토리, 원래는 두 번째 웹소설 작품으로 만들어볼까 싶어 1화까지는 써 놓았던 작품. 아무래도 가상의 배경에, 평범하지는 않은 외형을 띠고 있는 인물들이다 보니 일반 소설로 담기에는 무리가 있었는데 그렇다고 웹소설로 그려내기에는 자극성이 팍팍 터지지 않아 고민이던 참이었다.



'장르소설'이라는 걸 알고 있었더라면 아, 이건 바로 장르소설감이야! 했을 텐데 뭘 아는 게 없으니 1화만 써서는 그대로 방치했던 그 이야기. 그것으로 나는 나의 첫 장르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기존에 진행하던 원고들에 이 장르소설을 끼우며 병행했다.



어떤 종류의 글을 쓸 때도 그것의 장점과 단점은 명확했다. 즉, 에세이든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웹소설이든 어떤 글이든 장점과 단점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장르소설은 아니었다. 내가 느끼기로, 장르소설을 쓰는 데 '아, 이건 좀 힘들다' 하는 부분이 딱히 없었다. 오로지 장점만이 그득그득, 판타지 배경으로 내가 쓰고 싶은 환상을 가득가득 펼칠 수 있게 해주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문학의 세계였다.



그래서 나의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현란하게 움직였다. 아, 소설로 이런 걸 쓸 수 있다니! 일반 소설에는 현대가 배경이었고, 그래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도 다소 한계가 있었기에 늘 어딘가 조금 아쉽다고 느껴왔었다. 그런데 그 아쉬움을, 장르소설에서는 모조리 날려버릴 수 있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쇼팽 공항



두 달이 흐르고, 어느새 나의 찬란한 태양신을 담은 장르소설은 원고지 기준 700매 이상을 넘겼다. 애초에 계획했던 분량이 500매-600매였는데 벌써 700매를 넘겼으므로 이제 얼추 마무리를 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 장르소설의 마지막 10페이지 정도를 남겨뒀을 때, 나는 유럽의 공항에 있었다. 출장지에 있는 남편을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아. 오늘 끝내고 싶었다. 남편이 있는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이 장르소설을 반드시 완결내고 싶었다. 그때 내게는 보딩 전까지 1시간 반, 비행기 1시간 반 이렇게 총 3시간이 있었고, 나는 그 3시간 안에 장르소설의 엔딩 장면까지 딱 깔끔하게 쓰기로 결심했다.



바르샤바 쇼팽 공항에서 홀로 노트북을 들고는 이리저리 자리를 찾아 서성거렸다. 어디서 쓰면 좋을까. 어디서 써야 집중해서 잘 쓸 수 있을까. 남편 만나기 전에 결코 끝내고야 말리라···. 유럽인들로 빽빽한 출국장 안을 휘휘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견했다.



Bar



하필 내가 탈 비행기 게이트 바로 앞에 조그마한 바가 있던 탓에 어쩐지 안 가볼 수가 없었고, 노트북을 품에 더 꼬옥 안은 채 그 앞을 기웃거렸다. 자리는 괜찮았다. 전형적인 간이 바 형식이랄까. 가격도 나쁘지 않았다. 300ml 생맥주 한 잔에 만 원 정도. 괜찮긴 한데 나는 갈등했다. 무척이나 갈등했다. 공항치고는 비싼 축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300에 만 원?



보통 유럽 여행을 다닐 땐 항상 남편이 옆에 있었고, 공항에서 맥주를 발견해 쓰읍-입맛을 다시고 있으면 남편이 꼭 "한잔 해!"라며 등을 떠밀었기에 어쩔 수 없이 꼭 한잔은 마시곤 했다. 그런데 혼자 있으니 어쩐지 조금 돈이 아깝다 느껴지는 것이었다. 게다가 굳이 알코올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머리가 팽팽하게 잘 돌아가던 시간이라 문제없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차라리 비행기에서 마시자.'



하지만 몇 달이나 잡은 이 첫 장르소설을 마무리하는 날인데, 그래도 한잔은 해야겠지 않나 싶어서 일단 비행기에서 와인 혹은 비어를 마시기로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공항에서는 곧 Bar가 한눈에 보이는 아늑한 대기석에 자리를 잡고, 허벅지 위에서 노트북을 열었다.





늘 그렇듯, 공항은 소란스러웠다.



제대로 집중을 하기 위해 나는 평소보다 조금 더 요란한 플레이리스트를 찾았다. 글을 쓸 때는 항상 그 글의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쏙쏙 찾아 듣는데, 그럼 이제 몰입감이 배로 증가한다. 음악 앱을 슥슥 넘기며 나는 고민했다. 뭘 들어야 하지? 뭐가 어울릴까. 장르소설의 엔딩 부분은 각성한 태양신이 빌런을 처단하는 내용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세고, 인상적이고, 강렬한 음악이 필요했다.



내 취향에 맞게 앱이 추천해주는 뮤직 리스트를 홱홱 넘기는데 웬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어···? 나는 마치 계시라도 받은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쿵쿵대는 리듬을 느꼈다. 그 노래는,



넌 나의 노예-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90년대생인 나, 라떼 시절의 대체불가 탑아이돌 동방신기의 '주문'.



아앗···! 가슴이 뛰었다. 이거다. 이거야. 이 노래가 오늘의 내 배경음악이다. 가사도 딱 맞았다. 오만한 나의 태양신이 빌런을 처리할 때 딱 맞는 그런 거만한 느낌. 고귀한 턱을 꼿꼿이 세운 채 가련한 중생들을 내려다보는 장면. 아아. 바로 이거다. 나는 곧바로 주문 한곡반복을 설정해 놓고, 700매를 훌쩍 넘긴 그 파일을 열었다.



나는 내가 만들어낸 태양신에 빙의라도 한 듯 눈썹을 비스듬히 올리며 까딱거렸다. 콧대를 한껏 들어 올린 채 거만한 눈길로 노트북을 내리깔아보며 미친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렇게 넌 나의 노예를 쉴 새 없이 반복하며 한 장면, 한 장면 만들어갔다. 그리고 마지막 3페이지 정도 남았을 때,



-Ladies and gentlemen, we are now ready to begin boarding for flight···.



내가 탈 비행기의 보딩 안내 방송이 나왔다. 아. 조금만 더 쓰면 되는데. 거대한 아쉬움의 탄식을 내뱉고는 노트북을 덮었다. 그래. 얼른 자리에 앉아서 마무리하자. 반드시 끝내야 해. 반드시. 다시 한번 다짐을 단단히 굳히며 유럽 저가 항공사인 위즈에어 비행기에 올랐다.



저녁 시간이라 특히 풍경이 예뻤다. 하지만 그 풍경에 취할 새도 없이 안전벨트 등이 꺼지자마자 다시 노트북을 켜고, 원고 파일을 열었다. 주문을 들으며 잠깐 깨졌던 몰입을 되살렸다. 기내에서 마시겠다던 술은 일단 마지막 장면까지 다 쓰고, 그러니까 완벽히 엔딩을 친 후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로 탈바꿈해 있었다.



완결까지 쓰고, 와인 마시자.



기내에서도 와인 한 잔에 만 원은 했지만, 그게 뭐 대수랴. 무려 700매가 넘는 장르소설 한 편을 끝냈는데! 츄르릅, 입맛을 다시며 나는 재빨리 손가락을 타닥타닥 움직였다.



위즈에어 기내, 그램은 크다...



넌 나의 노예.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입속으로 가사를 중얼거리며 또 한껏 눈썹을 들어 올린 요상한 표정으로 집중하니 어느새 나는 마지막 장면, 마지막 줄을 쓰고 있었다. 아.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문서 통계'에 들어가 원고지 매수를 확인했다. 총 730매였다. 두 달에 730매 원고를 또 하나 완성했다. 소설을 또 하나 만들었다.



아. 잘했어. 너무 잘했어.

세계관이 복잡해서 힘들었지만,

정말 잘했고 장하고 기특하다.

고생했으니, 이제 와인 한잔 해!



귀에서는 아직 끝나지 않은 '넌 나의 노예'가 반복되는 중, 나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양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이내 노트북을 덮어 조심스레 가방에 넣고, 와인을 주문할 현금을 꺼내려는데,



-Ladies and gentlemen, we will be landing shortly. Please make sure···.



아···?

벌써 착륙이라고?

1시간 반이, 지났다고···?



너무나 몰입한 탓에 1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음을 눈치채지 못했더랬다. 이제야 조금 즐겨보려 했는데! 장르소설을 끝낸 기쁨을 술과 함께 만끽하려 했는데! 아쉬웠다. 대단히 아쉬웠지만 뭐 곧 남편 만나니까. 남편이랑 축하하면 되겠다며 꺼내었던 현금을 아쉬움과 함께 꼬깃꼬깃 접어 다시 지갑에 쏙 집어넣었다.



유럽 비행기에서 완결 낸 나의 첫 장르소설. 나의 글 세계에 '장르소설'이라는 분야가 정정당당히 추가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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