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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18. 2021

오늘 다섯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십 년의 종점, 새로운 시작점에서

'퇴직원을 받아 들었다'


다시 이런 날이 올까 했다. 최근 몇 년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속상하고, 스트레스받던 많은 날 때문에 말로는 이미 퇴사와 이직을 거듭했었다. 하지만 정작 퇴직 서류를 작성하는 마음은 그런 날들과 다름을 알았다. 과거에는 별일 아닌 듯 퇴사했었는데 이번 퇴사는 마음부터 조금 남다르다. 조금 말캉해진 것 같기도, 조금 울컥하기도 하면서 이곳에서 짧지 않은 시간이었음을 부쩍 더 실감한다.


십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프로젝트 수행 완수와 제안했던 사업 수주로 여러 동료들과 기쁨을 나눴던 순간도 있었다. 해왔던 업무의 결과와 성과로 외부 기관으로부터 수상자로 뽑혔던 행복했던 순간도 있었다. 관리자와의 부서 운영 문제로 다툼을 거듭하다 인사 불이익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받고 억울해했던 적도 있었다. 이 일로 낙점 찍힌 오점이 꼬리처럼 물고 다니며 결국 세 번의 진급 누락까지 되고서야 모든 걸 내려놓았던 아픔도 있었다.


내 삼십 대 후반부터 십 년을 보낸 이곳에서 난 이젠 떠나기 위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작별을 위해 내 마음 깊은 곳 뽀시레기 한 줌까지도 탈탈 털어 정리 중이다. 아쉬움과 서운함은 모두 이곳에 두고, 좋은 추억과 행복했던 기억만을 갖고서 떠나려고 한다. 막상 퇴직원에 부서장 사인을 받기 위해 결재판을 내밀 때 입에서 맴돌던 말을 결국 내뱉지 못했다. 서운했다고. 그냥 모든 게 아쉬웠다고.


지난 십 년을 돌아보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퇴사를 앞둔 얼마 전부터 지나왔던 하루하루가 생각나는 날이 많았다. 더 이상 찾지 않을 것 같던 과거 동료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싫지 않았고, 그래도 십 년 세월에 무언가 남는 기분이 들었다. 날마다 점심 약속에 커피 약속까지 있어서 그런지 그날그날 선택해야 할 메뉴 때문에 행복한 고민이 반복됐다. 하지만 역시 싫지도 않고, 귀찮은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행복한 고민이다.


회사를 다닌 십 년의 시간 동안 십 년 세월에 걸맞게 난 많이도 변했다. 아니 많이 늙어 버렸다. 어느새 앞머리, 옆머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지 오래다. 머리가 조금만 길면 염색해야 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이젠 흰머리가 어색하지 않게 됐다. 얼굴 여기저기에도 주름 자욱이 한둘이 아니다. 역시 세월을 비껴갈 수 없음을 서글퍼하며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때늦은 후회도 해본다. 그래도 십 년의 훈장쯤으로 생각해보려 한다.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앞으로 내 직장생활에서 밀린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십 년 뒤의 얼굴을 상상하며, 지금 모습에도 감사하며 얼마 남지 않은 사십 대를 보내야겠다는 각오가 선다.


며칠 전 이직할 회사에 잠시 다녀왔다. 이직하는 곳의 대표이사 요청으로 근로계약서와 연봉계약서를 서명하기 위해서였다. 매년 받아 들었던 연봉계약서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 십 년간 한 회사 이름으로 열 번의 연봉 계약 사인을 했었다. 큰 인상률이 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기대 이하의 인상률에 아무 감흥 없이 서명하기 급급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명 이후에는 의미 없는 종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받아 든 연봉계약서는 십 년 만에 바뀐 회사명이 자리하고 있었고, 직급도 변경됐다. 정말 십 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곳으로 옮기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퇴직원을 제출했다'


십 년을 정리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까? 얼마나 많은 문서를 작성하고, 옮겨 써야 할까? 나만의 오해였다. 며칠간의 정리로 모든 문서와 업무 인수인계는 끝났다. 오히려 내가 했던 업무가 이렇게 빠른 시간에 정리될 수 있다는 게 아쉽고, 서운했다. 지내온 긴 시간에 반해 인계할 업무의 양은 마치 그 시간의 반비례한 무게인 것처럼 아주 작게 느껴졌다. 내가 했던 업무를 스스로 부정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배우게 된다. 사람으로 빈자리는 사람으로 채운다는 것을. 아무리 중요한 업무를 맡고 있었다고 해도 그 중요한 업무는 시간만 걸릴 뿐 누군가가 다시 맡아서 하게 된다는 것을.


그래서 난 아쉬움도, 불평과 불만도 모두 십 년 세월과 함께 이곳에 두고 가려고 한다. 지금 당장은 쉽지 않겠지만 새로운 일과 보금자리가 내게 익숙해질 때쯤이면 그 십 년을 웃으며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난 오늘 퇴직원에 서명을 받으며 최근 십 년을 진심으로 정리하고 있다. 앞으로의 나를 응원하기 위해 더 열렬하게, 진심을 다해서 이곳에서 지낸 십 년을 행복한 기억만으로 채워가려고 한다. 앞으로 나의 십 년을 추억하고, 기억하기 위해서.


'그렇게 난 오늘 내 인생의 다섯 번째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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