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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Dec 26. 2022

사장님 십 년 후에 퇴사해도 될까요

십 년보다 일 년이 더 소중한 이유

 "이 부장님, 잠시 얘기 좀 할까요?"

 "네? 아, 네~"

나란히 마주 앉은 부서장의 시선은 창 밖을 보고 있고, 할 말은 있는데 입 밖으로 내기 어려운 말 때문인지 입술을 달싹거리는 모습이 무거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우습게 보인다.

 "이 부장, 정말 미안합니다. 다음 달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자주 연락드릴게요' 인사를 뒤로하고 그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뒤돌아 가는 그의 모습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발걸음이 더 씩씩해 보였다. 자신의 몸통 반만 한 종이상자를 양손에 들고서 복도를 걸어서 회전문을 빠져나가는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런 퇴사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그의 씩씩한 걸음이 난 더 슬퍼 보였다.


회사가 배경인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모습이지만 현실에서는 처음이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의 정리해고. 한 때는 그의 매니저였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부서가 없어지고, 당시 다른 부서의 동료인 내게는 그의 퇴사를 막을 수 있는 힘이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내 무능함에 좌절했고, 정리해고자 명단에 동료의 이름을 적었던 그의 관리자에게 분노가 일었다. 그렇게 난 그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회사는 가정이 아니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는 가족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마음은 떠났지만, 그  후로도 난 삼 년을 더 회사를 다녔다. 그렇게 십 년이 되었을 때 난 회사를 떠났고, 마지막 퇴근 때의 내 마음은 서운함도, 아쉬움도, 시원함도 없었다. 정말 어떤 감정도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신기하게도 정말 그저 그랬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 함께 일했던 직장 후배와 점심을 먹을 일이 생겼다. 이직을 하고 얼굴을 본 것이니 일 년이 넘은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후배가 최근까지 내가 십 년을 재직했던 직장을 다녔던 터라 회사의 근황과 남아있는 동료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더 이상 묻지 않을 줄 알았던 전 직장과 동료들의 안부를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후배의 대답에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회사 전체를 따져봐도 이제 내가 아는 직원은 퇴사 전 부서에 남아있는 일부 직원들이 전부라는 것이다. 그 많은 A팀, B팀, C본부 모두 하나씩, 하나씩 퇴사를 했고, 심하게는 조직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정말 황당하고, 어이가 없는 얘기였다. 그러나 전혀 예상이 되지 않았던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사람 귀한지 모르는 회사였고, 퇴사를 위한 면담을 하거나, 퇴사 의견을 내비친 직원이 생기면 이유를 물어보고, 붙잡아 보려는 노력조차 없었다. 회사만 존재하면 사람이야 부속품처럼  바꿔 쓰면 된다는 식이었다. 사옥을 짓는 결정을 한 것도 직원들 출퇴근 고려 없이 떡하니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조차 어려운 최악의 교통 불통지역에 착공을 했고, 어차피 퇴사할 사람들은 사옥 핑계가 아니라도 퇴사할 거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을 밀어붙였다.


미련도 없이 깨끗하게 잊은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십 년 세월이 무섭긴 했다. 머리는 잊었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나 보다. 정작 내가 떠난 회사가 잘 되었어도 조금은 씁쓸했겠지만 오늘 들었던 후배의 말처럼 사람들이 뿔뿔이 떠나고, 직원들 대부분이 강제 세대교체된 회사의 실체를 마주하니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잘 나가던 회사가 파산이 되면 관련된 관계사나 하청업체가 줄도산이 되는 사례를 여러 차례 봤다. 줄줄이 이어서 퇴사하는 옛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사람 귀한 줄 모르는 회사의 말로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그 회사 경영진은 새로운 사람을 뽑으며 문제가 없다고 과신하겠지만.


스며든다.


직장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돈벌이 수단이다. 하지만 이런 직장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사람과의 관계다. 아무리 일로써 만난 관계라고는 하지만 하루에 삼분의 일 이상을 함께 지내는 동료, 선후배들이다. 그냥 무시하거나 간과하기에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과 사람들이다. 한 번 정도 혼밥 하는 식이 아닌 하루에 많은 시간을 그들과의 사이에서 함께 숨 쉬고, 먹고, 일하면서 보내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직장에서의 관계는 선택이 아닌 필수 요건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혼자 일하는 직군이 늘고, 코로나 이후 업무 환경도 많이 뀌었다. 관계라는 이름의 무게를 많이 줄였고, 대면 이상으로 비대면도 일상화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온라인 업무 환경에서도 피할 수 없는 것 또한 사람과의 관계다. 혼자 처리하는 업무가 아닌 이상 '협업'이라는 이름으로 동료와 함께 일하는 업무 공간, 시간이 있을 수밖에 없고, 비대면이라도 소통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회사도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고, 그런 사람 간의 관계에서 성장하고, 발전해 나간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난 작년에 이직을 했다. 새롭게 시작한 곳에서 일 년을 넘게 보냈다. 주변에서는 늦은 나이에 새로운 환경에, 새로운 직무를 선택한 날 걱정하는 시선도 많았고, 응원하는 지인도 있었다. 이런 시선에 처음 시작은 두려웠지만 이젠 그런 선택에 후회가 없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 옮겨온 회사에서는 좋은 관계로 지내는 동료들이 대부분이다. 혼자 해 낼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익숙지 않은 업무들이 대부분이라 당연히 동료들의 도움을 받았고, 나 또한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됐다. 손해 본다는 생각보다 서로에게 이로운 영향을 준다는 생각이 하루하루를 웃게 하는 힘이다. 스타트업이라 업무처리에 힘이 많이 들지만 난 십 년을 너끈히 다닐 수 있는 회사를 찾은 기분에 내일도 출근이 설렌다. 이제 퇴사는 회사가 아닌 내 선택임을 믿으며 오늘도 난 회사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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