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사랑의 유효기간은 얼마나 남아있나요
'아이 더워요. 팔이 왜 이렇게 뜨거워.', '내가 떨어지라고 경고했어요.'
몇 해전부터 여름만 되면 아내와 난 전쟁이다. 다른 계절에는 괜찮던 관계가 여름만 되면 유독 멀어진다. 이건 별거까진 아니더라도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따로 없다.
나는 애초에 여름을 싫어했다. 몸에 열이 많다 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땀으로 흥건해졌고, 젖은 옷과 함께 기분도 축축하게 가라앉곤 했다. 그러다 보니 여름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갈 때는 늘 여벌의 셔츠를 챙겼고, 밤에는 선풍기를 틀어야 겨우 잠이 들 수 있을 정도로 곤욕스러운 계절이었다. 특별히 물을 좋아하지도 않았으니 여름은 내게 그저 인내의 계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건 한 사람 덕분이었다.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 당시 난 군 복무 중이었고, 잠시 휴가를 나와 우연히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던 게 전부였다. 처음 본 그녀는 눈에 띄게 귀여웠고, 그 시절의 나는 이성에 유난히 호기심이 많던 군인 신분이어서 더 아내에게 관심이 컸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무엇이든 해야 했고, 휴가 복귀하고서도 꾸준히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다. 어떻게든 인연을 이어가고 싶어 무던히 애썼던 시절이었다.
어쩌면 그 노력이 통한 걸까. 전역 후 우리는 따로 정한 기념일 없이 자연스럽게, 매일을 함께 하게 되었다. 하지만 풋풋했던 우리 사이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했다. 군대까지 다녀온 스물셋 연인임에도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한 채 두 달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귀여웠던 시절이고, 설레었던 감정으로 서로를 확인하는 게 조심스러웠던 하루하루였다. 가끔 용기 내 손을 내밀면, 그녀는 모른 체 앞을 보거나 잠시 잡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빼곤 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고 우리에게 첫여름이 왔다. 덥고 끈적한 그 계절은 여전히 나를 불편하게 했지만, 아내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 불편한 기분을 잊을 수 있을 만큼 설레고 기분 좋았다. 늘 그렇듯 그녀를 만나기 전 땀에 젖을까 봐 여벌의 티셔츠를 챙겼고, 약속 장소에 도착해서는 주변을 살피며 선풍기나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혔다.
그날도 그녀와 약속을 하고 먼저 약속장소에 나가 그녀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이 되자 십여 미터 떨어진 길모퉁이를 돌아오는 아내가 보였다. 그날 아내는 평소와 달리 짧은 반바지에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항상 긴 바지에 박시한 셔츠를 즐겨 입던 그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차림이었다.
나는 이유 없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 두근거림을 참지 못한 채, 마치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더니 조용히 내 팔 안쪽으로 자신의 팔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우리는 처음으로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여름밤을 걸었다.
그 순간부터였던 것 같다. 여름이, 그 지긋지긋했던 계절이 조금은 좋아지기 시작한 건. 그 여름, 그녀는 종종 반바지에 박스 티셔츠를 입었다. 특히 옅은 차콜색 카고 반바지에 하얀 반팔티를 입은 날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여전히 손은 잘 잡지 않았지만, 대신에 팔짱을 끼고 거리를 걸었다.
그녀의 팔에서 전해지던 따뜻한 체온이 여름의 열기보다 더 깊게 가슴을 데웠다. 아직도 여름이면 나는 가끔 아내의 팔에 슬며시 내 팔을 얹어보곤 한다. 그 시절의 감정을, 체온을,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그렇게 우리 앞엔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아직도 가끔은 '오빠' 하며 애교를 부리던 그녀가 함께하고 있지만 그 시절처럼 내 팔 위에 자신의 온기를 온전히 전하던 아내는 민망해서인지 매일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그 시절의 설렘은 옅어졌지만 깊은 신뢰, 서로에 대한 배려 그리고 사랑만큼은 여전하다. 더 이상 여름의 설렘 같은 연애는 아닐지라도, 그 여름만 생각하면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을 환히 밝히는 것 같다.
조금씩 무더워진 요즘 둘이 나란히 외출할 때면 난 여전히 아내의 온기가 그리워 옆자리를 내어놓으라고 손을 내민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아내의 냉기다.
"오빠, 너무 붙지 마. 오빤 열도 많아서 나처럼 온도에 민감한 사람은 너무 덥다고. 알았죠?"
"에이 너무 밀어내지 말고. 나야 영희 씨 너무 좋아서 그러지."
"나 너무 좋아하지 말고. 여자 나이 오십 넘으면 남성 호르몬이 많아지는 거 알죠? 그냥 좋은 동성친구 더 얻었다 생각하고 살아."
올여름 더위가 최악이라고 하던데 이런 아내 냉기 덕에 조금은 시원하지 싶다.
올해도 여름이 왔다. 산책길에 땀이 흐르면, 문득 아내와 보냈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몸은 예전 같지 않지만, 마음만은 여전히 그 여름을 기억한다. 그때처럼 설레는 여름은 다시 오지 않겠지만 여전히 지금도 날 설레게 하는 아내가 옆에 있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가득한 우리가 있어서 여전히 난 여름이 기다려진다.
영원불변한 것은 없다. 튼튼하게 지었다는 건축물들도 시간이 지나면 낡고, 금이 가고,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오래된 건물일수록 더 오래 쓰기 위해 관리가 필요하고, 보수가 필요한 법이다. 살아있는 생명체도 아닌 건물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야 변하는 게 당연한 순리다.
"사랑은 1년간 열정, 2년간 애착, 3년째엔 권태다."
- 3년:사랑의 유효기관 中 -
프랑스 작가인 프레데릭 베그베네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인 '3년:사랑의 유효기간'에서 사랑의 유효기간을 3년이라고 얘기했다. 소설에서의 의미와는 다르지만 실제 신경학적으로도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고 얘기들을 한다. 이는 연애의 설렘을 유발하는 호르몬인 도파민이나 페닐에틸아민 같은 것들이 2~3년 정도 지나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정말 사랑이란 처음 느낀 감정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그런 감정을 유지해야만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난 사랑이란 단순히 설렘만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 '팍'하고 꽂혔던 그런 사랑의 감정은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도 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 갖는 감정과는 다른 특별함이라면 그 또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석이 바뀌는 게 사람 마음인데 수십 년 바뀌지 않는 마음은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몸도 이삼십 대 때와 사오십, 육칠십 대가 다르듯이 사랑에 대한 마음도 그렇기 않을까. 난 수십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 사랑을 과거 풋풋한 사랑과는 비교되는 숙성된 사랑이라고 말한다. 표현이 세련되지 못하고, 조금은 투박해져도 그 또한 표현하면 사랑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 사랑은 존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당신이 가졌던 그 마음을 내려놓기 전까지 그 또한 당신만의 사랑 표현법이다.
이번 브런치북 연재는 6월 마지막 주(25일)에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총 30주간 연재한 글 읽어주신 많은 구독자분들께 감사드리며, vol 2가 준비되는 대로 새 시즌으로 다시 여러분께 인사드리겠습니다. 7월부터는 새롭게 준비하는 연재로 인사를 드릴까 합니다. 전혀 다른 장르의 이야기로 기획, 연재할 계획이니 많은 기대와 관심 부탁 드립니다. 다음 주 마지막 연재까지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