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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옆집언니 May 22. 2022

아들놈의 갈등 해결 연대기

아들은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아침저녁으론 바람이 차고, 한낮엔 날이 덥고..

아직 조금 더 긴 옷이 필요할지 모른다며 원치 않게 옷장 정리를 미룰 핑계들이 자꾸 생깁니다


벼르고 벼르다 오늘 드디어 옷장 정리를 했습니다

한 해가 다르게 폭풍 성장하는 아들의 옷을 정리하다 보니 꽤 많은 양의 옷이 더 이상 아들의 몸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조용히 헌 옷 수거함으로 보냈습니다


같이 보기로 한 영화 약속을 확인하는 말에 뭔가 쭈뼛 거리는 폼이 말하기 곤란한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친구들이 그 영화 보자고 해서 나도 모르게 알았다고 해버렸어. 그래도 엄마랑 먼저 보고 친구들이랑 두 번째 보면 돼'"라고 하는 순간... 이건 뭐지? 익숙한 데자뷔??


아들과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이 녀석 이제는 저와 보는 영화보다 친구들과 보는 영화가 더 재밌어진 모양입니다



아들은 어느덧 인생의 큰 중심이 친구들로 옮겨간 상태입니다

그만큼 자랐다는 뜻이겠죠?


친구들 모임이 있긴 한데 약간 어정쩡한 포지션인 것 같습니다

그 모임은 아들의 친한 친구의 초등학교 모임인데 게임하다 보니 같이 친해져서 우야무야 섞이게 된 것 같은데.. 오늘 아마도 제 아들만 빼고 초등학교 친구들끼리 모인 모양입니다


같이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약속을 펑크내서 무산이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초등학교 모임에 갔었다는 걸 알고 너무 분해하고 속상해했습니다

자기는 그들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 아이들 중 누구도 그 모임자리에 자긴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며 섭섭하다 합니다


사실 저희 아들은 절 닮아서인지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곰살맞게 분위기를 맞출 줄도 모르고 먼저 말을 걸거나 장난도 치지 못하는 성격이라 늘 누가 먼저 와서 손을 내밀어 주어야만 용기 내는  전형적인 소심한 아이입니다


초등학교 때도 친구들 모임에서 몇 번의 소외됨을 느끼고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이놈에 대한민국은 이상하게  초등학생들의 교우관계도 엄마들의 모임에 따라 좌우되다 보니 직장 다니고 사회성도 부족한 저는 늘 엄마들 모임이 부담돼서 참석 안 하곤 했는데 그게 제 아이를 무리에서 소외시키는 이유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때 아들은 늘 서러워하고 속상해하고, 화를 내기도 하고 대부분의 날은 너무 서럽게 울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 잘못인 것 같고, 날 닮아 소심한 것 같고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늘 미안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의 갈등의 해결 방식은 주로 "서러움의 대성통곡"이었던 것 같습니다

해결할 엄두는 내지도 않았었고 자신이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은 못한 채 그저 넋 놓고 울기만 했습니다


그 어린 녀석이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며 서럽게 울 때 얼마나 속이 부글거리고 화딱지가 나던지... 그럼에도 어금니를 깨물고

내일은 다를 거야.. 친구들도 사정이 있었겠지.. 아들이 속상했다고 같이 놀자고 말해보면 어떨까? 라면 책에서 배운 대로 설득해보았지만.. 아마 아무 힘이 되진 못했을 것 같습니다


중학교 시절 아들은 유사한 경험을 두어 번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는 상대방 친구들에 대한 적의를 느끼는 것처럼 분함이 분노의 감정으로 변한 것 같았습니다

화가 나. 너무 짜증 나. 배신감이 들어, 다신 안 봐. 나쁜 놈, 온갖 나쁜 단어와 감정적 표현들로 섭섭함을 표시하더군요

급기아 늘 질질 짜기만 했던 아들은 소외 당사자에게 화를 내고 이유를 알고 싶다면 정면대결을 하더군요


가슴이 조마조마한 저는 이걸 개입을 해야 하나? 두고 봐야 하나 고민 끝에 일단 지켜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싸우다 보면 서로의 관점의 차이도 알게 되겠지.

오해라면 싸우더라도 풀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올 것이고, 악의였다면 친구 고르는 눈을 기르게 되겠지...라는 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몇몇 친구와는 지금도 허물없이 욕하고 놀리고 수다 떨면 지내는 친구가 되었고 몇몇은 다신 보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질질 짜기만 하던 아들이 문제를 정면대결하던 날


"이야 내 새끼 멋있네.  질질 짜고 피하지 않고 정면대결이라니... 많이 컸네 많이 커부렀어"라고 했더니


"어치피 친구는 내가 사귀고 내가 골라야 하는데 내가 친구 경험을 늘리는 게 당연한 거지, 엄마가 평생 친구를 골라줄 건 아니잖아"


질질 짜기만 하던 내 아들은 중학생이 되자 분함을 표시하고 항거하는 불도저가 되었습니다


이번 사태를 겪음에 아들은 어찌 대처할 내심 궁금했습니다

이전과는 다르게 전화통화소리가 조용조용합니다

차분하게 자기 기분을 설명합니다.

자기 입장을 굉장히 디테일하게 표현합니다

아주 긴 통화 끝에 아들은


"엄마 나 나갔다 올게. 아무래도 만나서 얘길 해봐야겠어"

라며 친구들이 모인 장소에 간다고 합니다

"초대도 안 한 자리에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아? 네가 꼭 친구 구걸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엄만 별론데? 그래도 네가 꼭 가고 싶은 이유가 있는 거지?"


"아무래도 이게 글이나 통화론 전달이 안될 것 같아.

애들 다 모여 있다니까 만나서 얘기해보고 정말 배척한 거면 나도 그 자리에서 손절하고 사정이 있었던 거면 재발방지 위해서라도 미리 약속을 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일단 얼굴 보고 말해보는 게 맞는 거 같아. 나갔다가 올게. "


뭐죠? 속 좁은 엄마가 된 이 기분?

아들은 그사이 조금은 문제를 차분히 보는 고삐리가 되었습니다

화를 내지도 , 분해하지도 않고, 일단 얼굴 보고 얘길 해봐야겠어 라는 어미보다 조금은 더 용감한 아이가 되었습니다


아... 이렇게 아들은 어른이 되어가는 건가요?

문제 해결의 방법도 조금씩  성숙해지는 걸까요?


양육권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 이런 모습들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비양육자가 되면 몸은 편하겠죠. 제 전남편처럼 연애도, 여행도, 술자리도 제약 없이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겠죠.


반면 양육자인 저는 아이에 맞춰 생활하다 보니 친구도, 여행도, 연애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는 엄마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거든요


비양육자에게 자유가 있다면, 양육자에겐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는 행복이 있습니다


아이의 기쁜 추억도, 좌절하고 우는 경험도, 연애하고 차여서 밤새 훌쩍이는 모습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모두 함께 할 수 있어서 전 자유로움보다 지금의 생활이 좋습니다


제 손으로 양육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훌쩍 성장한 아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싱글맘으로서의 양육이 때로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분명 행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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