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주차 | 혼자가 아니다 (1)

지금 내 옆에, 너가 있어 참 다행이다

by 고지은

돌아온 여름휴가

어디론가 떠나볼까 생각만 하다가 미리 준비하지 않은 탓에 언제나 엄마 아빠 집으로 향한다. 결국 올해도 그렇다. 꽉 찬 4일 동안 엄마가 해주고 아빠가 사주는 밥 얻어먹으며 편히 먹고 자고 왔다. 남편도 내가 콕 찝은 날짜에 휴가를 신청해, 함께 처갓집에 내려갔다. 200만 뷰 먹방이여 저리 가라! 오리 불고기로 든든하게 시작해 새우 소금구이, 한치와 문어찜, 회전초밥 그리고 고등어 쌈밥까지, 건강한 음식들을 줄지어 먹었고 아주 가끔 동네 수영장에서 물놀이도 하며 아무 근심 없이 쉬었다.




그렇게 온 가족과 맛스럽게 푹 쉬고 우리 둘(아니지, 뱃속의 아기까지 셋이구나.)만의 작은 집으로 올라온 밤. 남편은 침대 모퉁이에 앉아 밀린 회사일을 잠깐 들여다보고 있고 나는 그대로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파묻혀 있었다. 그러다 문득 < 나, 이렇게 편하게 살아도 괜찮은가 > 싶은 거다.




- 오빠, 나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 맞아? 아무 걱정 없이, 아무것도 하는 거 없이, 그저 먹고 자고만 하면서 지내도 되는 거 맞아?

눈물이 (또) 왈칵 났다. 행복에 겨운 포동포동한 시간을 음미하다가 이렇게 갑자기 서럽게 운다고? 요즘 참 평온해서 좋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결론은 아무것도 안 하는 무능한 사람이 된 것이다.




- 그럼, 당연히 되지! 그리고 하는 게 없긴 뭐가 없어. 하루 종일 아기를 품고 있잖아. 그리고 매일 책도 읽지,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려고 하고, 고민하면서 글도 조금씩 쓰고 있는데. 제일 중요한 일들만 하고 있구먼.

어머나, 맞다. 나 온종일 우리 아가를 품고 있잖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 지금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혹시 요즘 우울하냐고 배를 쓰다듬으며 물어보는 남편. 우울까지는 아니고 아주 가끔 갑자기 울컥한다고,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바로 털어놓으며 풀어서 그리 우울하진 않다고 내가 답했다.

금세 기분이 편해진다.. 그나저나 우리 남편, 이렇게 스윗한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뱃속의 아기에게도 아빠의 다정한 사랑이 전해졌기를.





며칠 전,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 남편이 그랬다.

- 여기저기서 듣기로 아내가 임신 기간 동안 남편에게 서운한 게 생기면 그 마음이 평생을 간다고 그러던데, 혹시 그런 게 있을까 봐 좀 걱정이에요.

엄마마, 별 걸 다 걱정하시네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흠칫 놀랬다. 혹시 내가 평소에 한 말 때문일까? 지금 떠올리면 별거 아닌 것으로 섭섭할 때마다 “아고, 나 혼자 임신했네. 그래 나 혼자만 임신했어. “라며 남편에게 종종 넋두리 놓기도 했다. 유튜브 보니까 아내가 임신하면 남편들은 매일 발 마사지 해준다더라, 주말엔 알아서 화장실 청소도 하고 이불 빨래도 해놓는다더라며 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굳이 투정을 부린 것이다.




주말엔 변비로 고생하는 나 먹으라고 단호박 수프 끓여주고, 평일 퇴근 후엔 부은 내 종아리를 어설프지만 쪼물거리며 풀어주는 내 남편에게 말이다. 한껏 부풀어 오른 내 배를 보고 신기하고 귀여워하는 남편에게. 점심시간마다 전화해서 몸은 어떤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는 내 남편에게. 참말로, 나 혼자 임신한 게 아닌데 말이다.

지금 내 옆에 남편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그런 걱정은 말어.





세상에 당연한 건 하나 없는데, 돌아보면 내가 가족들에게 당당하게 요구한 게 은근히 많았다. 남편에게는 휴가는 우리 가족 일정에 맞춰 써서 처갓집에 같이 가자고 하고, 친정 엄마아빠에게는 휴가 준비를 미리 못 했으니 엄빠집에서 좀 쉬겠다고 하고. 남편가 원하는 진짜 휴가가 뭔지도 모르면서, 부모님이 생각한 휴가 계획은 묻지도 않고. 그러면서 그들에게 아쉬운 건 조금도 참지 않고 말해버린다. 임신한 것이 정말 경이롭고 감사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세상의 중심인 것은 아닌데 말이다. 조건 없이 사랑을 흠뻑 주는 가족들에게 뻔뻔하게 응석 부린 게 참 많았다.


나 자신아, 이제 곧 엄마가 되는데 조금 더 성숙해져 보자. 이 모든 걸 기꺼이 받아준 남편과 가족에게 감사하자. 잘하자!



아가야,
엄마는 평생 사랑을 흠뻑 받았어.
엄마의 엄마 아빠, 그리고 아빠에게
심지어 아빠의 엄마 아빠도 얼마나 아껴주시는지 몰라.

사랑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세상을 우리 홍시에게 보여줄 생각에 엄마는 매우 기대 중이야.
우리, 사랑을 충분히 느끼고 배우고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자.

2025.08.11


우와, 눈썹은 아빠를 닮아 예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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