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주셨다고.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항상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너무 늦은 고백이 되어버렸지만 아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충분히 주셨다고.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항상 감사했다고 말이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회사에서 감정코칭 수업을 듣게 됐다고 했다. 동료는 그 수업의 과제로 '부모님 하면 생각나는 사물'에 대해 적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 과제명을 보고 나도 잠시 부모님 하면 떠오르는 사물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다발성골수종을 진단받기 10년 전, 아빠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입원을 했던 적이 있다. 아빠는 입원해 계신 병상에서 언니에게 로또를 사다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병상에 있는 아빠가 로또를 사달라고 하셔서 솔직히 당황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큰 병을 치르는 그 과정이 아빠에게 힘든 상황이었기에 그만큼의 행운도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빠는 그렇게 그 과정을 우리에게 내색하지 않은 채 다른 행운을 기대하시며 우리가 모두 피식 웃을 수 있는 사건을 하나 만드셨던 것 같다. 언니는 병원 근처 로또를 파는 곳을 찾아 아빠에게 로또를 드렸다. 물론 당첨이 되지는 않았다. 그저 그 일은 우리에게 재미난 에피소드가 되었다.
나는 아빠 하면 로또와 지갑이 떠오른다. 감정코칭 수업을 듣는 동료는 나의 답을 듣더니 의외라고 했다. 일확천금의 상징인 로또가 동료가 생각하는 우리 아빠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았나 보다. 하지만 나는 아빠에게 로또가 주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언니에게 로또를 사 오라고 말씀하신 그 이후에도 아빠는 꾸준히 로또를 사셨다. 아빠가 병상에 계시면서 우리에게 가장 많이 하신 말씀은 '미안하다.'였는데, 나는 그것이 아빠의 사랑을 담은 가장 아빠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아빠는 우리에게 늘 많이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으셨던 것 같다. 낳아주시고, 먹여주시고, 입혀주시고, 재워주시고, 교육시켜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닮고 싶은 성품과 많은 좋은 유전자를 물려주시고... 이 많은 것들을 해주시고도 아빠의 마음은 늘 미안하고 부족했나 보다. 그래서 늘 당신의 아픔과 슬픔, 힘듦과 괴로움은 참으시고 내색하지 않으시고 사셨나 보다.
아빠는 늘 두 딸이 알아서 잘 커주었다고 생각해 주셨다. 그 성장과정에서 많은 것들을 지원해 주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많으셨던 것 같다. 대단히 부유하지 않아도 늘 부족함 없이 컸던 것 같은데 아빠는 늘 여유로운 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으셨던 것 같다. 자식을 낳고 보니 부모의 마음은 해줘도 해줘도 더 해주고 싶은, 많이 해주고도 부족한 것 같은 마음이 마음 한편에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는 내가 돈을 번 이후에도 종종 용돈을 주셨다. 병상에 있을 때도 가끔 용돈을 주셨다. 늘 그렇게 주고만 싶은 아빠의 마음, 투박하고 무뚝뚝하지만 아빠는 그렇게 늘 우리에게 아빠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셨다. 우리가 커갈수록 아빠도 나이 들어가셨고 언제가부터 어깨와 허리가 조금 굽은 주름살과 흰머리가 많은 나이 든 아빠가 우리 곁에 있었다. 새롭게 무엇을 변화시키거나 상황을 역전하는 일은 아빠에게 이제는 더 꿈꿔보기 어려운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아빠가 매주 로또를 사며 잠시 바라셨나 보다. 로또가 될 확률은 정말 적지만 아빠는 그 적은 확률을 알면서도 잠시 꿈을 꾸셨던 것도 같다. 지금보다 더 많은 용돈을 주는 상상을, 지금보다 더 자주 용돈을 주는 상상을 말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을 아빠는 나의 인생에 남겨주셨음에도 늘 사는데 빠듯했던 그 미련이 우리에게 더 많이 주지 못한 것 같은 미안한 감정이 너무도 크셨던 것 같다.
너무 늦은 고백이 되어버렸지만 아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충분히 주셨다고.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항상 감사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