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월룡 <우리가 되찾은 천재화가> 학고재 갤러리 2019년 5월에
변월룡(1916∼1990)
전시장을 가득 메운 그림에는 인물과 풍경이 많았다. 판화를 통해 작업한 그림들의 필치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섬세했고 땅끝에서 구름까지 쉼 없이 그의 열정이 담겨 있었다. 그토록 많은 인물들과 풍경들을 보면서 그의 삶에 가까이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사실주의가 그를 매료시켰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주의란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사실주의의 더 넓은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일제의 압박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간 그의 어머니는 1916년 쉬코토프스키 구역의 유랑촌에서 그를 낳게 된다.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가족은 그를 러시아로 이주시킨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도 얼마 뒤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떠나게 된다. 193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1940년 러시아의 레핀 미술대학을 입학해 미술적 재능을 발휘했고,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1951년 동대의 교수직을 역임한다. 1953년 소련 정부의 지시로 북으로 건너간 그는 평양 미술대학 학장을 맡아 일본식의 잔재가 남아있는 북한의 현대미술 교육 커리큘럼에 대대적인 수정을 가해 오늘날의 교육체계를 확립한다.
북한의 여러 예술계 인사들과 뜻깊은 시간을 보내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당국의 귀하 종용에 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숙청(이런 이유와 달리 친소련 배척이라는 정치적 이유로 북에서 쫓겨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러시아를 향해 가게 된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을 테지만, 그러한 영향력을 고려해도 그에게 사실주의적 작품들은 또 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평생을 고국땅을 밟고 싶은 소망이 있었지만, 그것이 1년 여남은 시간 동안의 짧은 백일몽 같이 끝이 나고 말았다. 결국 다시는 고국을 갈 수 없었던 변월룡은 러시아에 머물게 되었다. 자주 자신이 태어난 연해주로 가서 풍경을 화폭에 담아오곤 했던 그에게 있어서 그 풍경들이 지니는 향수라는 것은 더 멀리 고국에 대한 향수일 것이다. 연해주의 풍경을 담으면서도 한반도에서 자라는 소나무를 화폭에 담았다는 사실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영원히 갈 수 없는 고국의 모습. 그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스쳐가는 풍경들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것은 세계적 이념 대립 속에서 그가 지켜내고자 했던 자신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그것들을 그는 화폭에 담아 영원히 남기게 됨으로써 스스로를 위로했는지도 모른다.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는 떠나야 하는 삶을 살다가 고국에서 추방되면서 영원한 여행자가 되어 버렸다. 매일같이 변해가는 풍경과 사람들 속에서 그는 언제고 헤어질지도 모르는, 또다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것들을 세밀하게 남겼다. 마지막까지 그는 고국에 대한 꿈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고향을 잃어버린 그에게 사실주의라는 것은 그가 간직하고자 했던 모든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움이 스민 슬픔이 그의 그림 속에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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