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4년 차입니다.
결혼 14년 차, 서로를 바라보는 우리의 표정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에 한동안 흠뻑 빠져서 보았다. 유연석과 문가영이 이끌어가는 감정의 선과 표정이 너무 좋았다. 김소연 시인의 글에 그런 말이 있었던가. 이해란 가장 잘한 오해이고, 오해란 가장 적나라한 이해이다. 극 중 유연석과 문가영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문구가 떠올랐다. 그들은 어쩌면 최선을 다해 서로를 이해하려 하는 것이었다고.
연민과 이해 속에 얽힌 오해마저 사랑의 결이었다고. 결말에 대한 말들이 많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을 이해해 버렸으니까.
그의 표정은 뭐랄까? 마주 앉은 이를 근사하게 만들어준다. 존중과 다정함이 담긴 표정, 그 이상의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그래서 함께 있으면 마음이 나긋해졌다. 매복되어 있던 상흔들이 회복되어 가는 듯했다. 듬성듬성 있던 작은 걱정이나 일상의 스트레스는 연애세포가 물리쳐버리는 연애초기를 훨씬 지나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적지도 많지도 않은 연애를 했지만 이런 사람은 처음이었고 14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아이들에게 틈만 나면 말을 해준다. 아빠는 현명하고 자애로운 사람이라고.
그러면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한다.
"맞아. 엄마, 아빠랑 정말 잘 결혼했어. 우리 칫솔은 최고지. 축하해." (뭐지 이 알 수 없는 배신감은...)
우리 집은 아이들이 지어준 별명으로 통한다. 아빠는 칫솔. 엄마는 히힝.(엄마의 웃음소리라고 한다. ;;;;;;)
어렸을 때부터 아빠가 부재중일 때, 아이들과 아빠의 좋은 점과 존경할 부분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웠던 날이 많았다. 하여 우리 집 아이들은 아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 편하게 장난을 치고 시시덕거리지만 권위가 있다. 권위는 존댓말과 각 잡힌 태도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거리감을 넓힐 뿐이지. 아이들의 표정을 잘 살펴보면 시시각각 수만 개의 감정을 드러낸다. 어른에 대한 존경심에서 오는 표정과 두려움에서 오는 닫힌 마음은 눈빛에서부터 달라져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고백하자면 실은 스스로 각성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남편의 칭찬을 끊임없이 하기도 한다. 좋은 점을 찾고 아이들과 말을 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졌던 나를 복기하며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순수하게 편견 없이 이야기해 주는 존재이므로 작은 입으로 제법 진지하게 고쳤으면 하는 점을 말해줄 때도 귀엽고 고맙다.
엄마들의 모임을 달갑지 않아 하게 된 이유도 연관이 되어 있기도 하다. 왜 수다의 시작은 아이의 학원에서 시작해서 남편과 시댁의 험담배틀로 끝나야만 하는가에 대한 찝찝함이 맴돌았었다. 웃고 즐거웠으나 돌아와 생각하면 개운하지 못한 감정은 휩쓸렸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자리에 공자처럼 앉아서 "우리 남편은 단점이 없어요."라며 분위기를 얼려버릴 순 없으니, 나는 그저 미지근하게 웃었다.
미소로 장단을 맞추지만 굳이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친분이 쌓이는 거라면 허물어지는 것도 시간문제임을 안다.
살면서 한 번도 균열이 없었겠냐만은, 틈이 벌어질 겨를이 없을 만큼 오래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소모되는 감정을 붙들고 있지 않고 흘려보냈다. 기분이 나쁠 땐 곱씹지 않고 다른 것에 집중하며 환기시키려 한다.
편안하고 익숙하여 내키는 대로 말하고 표정 짓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암묵적으로 서로를 존대한다. 가깝지만 함부로 드나들 수 없고 창문이 있어 환기가 가능한 사이랄까!
매년 계속되는 진부한 밸런타인데이를 잊지 않고 꽃배달을 보내며 표현하고, 때론 이유 없이 꽃 한 송이를 들고 퇴근하는 이가 있다. 전해받은 마음을 어쩔 줄 몰라하며 설레어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이젠 기꺼이 유연하게 받는다. 꽃과 편지가 주는 오래된 사랑의 세레나데는 어쩌면 진부한 사랑의 이해가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는 부는 바람 속에 오해가 넘실거릴 때도 가벼이 균형을 잡을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