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로 떠난 여자 1편.
오십에 돈벌이도 가족도 버리고 호수로 떠났다.
금장에 35사이즈 카멜 컬러 에르메스 버킨백,
캐시미어와 버진울 혼방에 라이트 그레이 레이쎄르 캐시미어 막스마라 코트 없이도 지난 겨울, 나는 ‘가장 부러운 여자’ 가 되었다. 호수가에 내 작업실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혼해서 23년, 세 아이를 키우고 살아오면서 많은 걸 기다리며 버텨왔다.
남편이 좀 더 겸손하기를, 돈을 더 잘 벌어주기를, 아이들이 좀 더 잘 해 주기를, 내 인생에 뭔가 행운이 성공이 어딘가에서 와 주기를 기도한 날이 많다.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 남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며, 이미 지난 과거를 돌아보며 눈물을 짓고 원망한 날도 많았다. 무엇을 위해서든 변해야한다면 그건 나 자신에게서 시작된단 걸 알면서도 핑계를 대며 직면하지 않았다. 내 맛이 아닌 것 같은 불운에 대해서는 보상받고 싶은 마음을 놓지 못했다. 오십이 되자 살아오던 대로 산다면 역시 그런 인생의 반복이라는 사실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나를 직면하러 떠나기로 했다.
산골이든, 바닷가든 나만의 방을 가질 수 있다면 그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 오십의 삶을, 아랫배가 쳐지고 허릿살이 불고 기억력이 사그라든다는 중년이라도 내 삶을 하루하루 알뜰히, 싱싱하게 살아내고 싶었다. 남편도 자식도 내 부모도 아닌 나의 자취와 정체, 진심을 진지하게 대면하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대소사 챙기고 중학생 막내딸 챙겨가면서 고요한 틈에 얼마간의 글쓰기를 하는 걸로는 될 수 없었다.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에 나만의 방을 가지는 일이 절실했다. 그 방에서 무엇을 하는가보다는 혼자 그 방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이런 말을 했다.
<11월의 호수 풍경/ 사진, 임정희>
나는 내 인생에 불을 찾아 떠나기로 했다.
나에게 질문하기 위해 떠나기로 했다.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줄리아 로버츠는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투스카니 태양 아래>에서 다이안 레인은 전 재산까지 탈탈 털린 이혼녀로 이탈리아로 떠난다.
<해리스부인, 파리에 가다>에서 청소부인 해리슨 부인은 전 재산을 털어 디올 드레스를 사러 파리로 간다.
나는 오십에 나를 찾아 호수로 떠난다. 호수로 떠난 나를 친구들은 부러워했지만 자유부인이 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돈벌이를 포기할 용기, 가족을 뿌리칠 용기, 무엇보다 나 자신과 직면하겠다는 용기 말이다. 내 심장과 영혼에 안부를 묻기 위해 이곳이 아닌 다른 저곳에서 살아볼 용기. 간절히.
이제 짐도 다 꾸렸다.
180일간의 호수마을 나만의 방을 향해. 혼자 물안개가 자욱한 겨울 아침산책을 하고 혼자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씻고 저녁노을에 잠식된 호수를 또 산책하고 추위를 견디며 혼자 어두운 방에서 밤잠을 설칠 날들을 위해. 짐이래봐야 기내용 트렁크에 들어갈 것들, 일인용 침구, 한벌의 밥그릇과 국그릇, 치솔과 치약...
일인분의 위대한 날들을 위해 중요한 건 단 하나 '나 자신' 뿐이다. 나를 불태우기도 하고 나를 뜨겁게도 해 줄 유일한 '나 자신' 말이다. 가족도 버리고 밥벌이도 버리고 나를 찾아 출발한다. 엄마, 아내였던 일상이 등 뒤로 멀어진다. 호수에서의 날들이 다가온다.
'나'를 만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