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수로 떠난 여자 2편.
나만의 방을 가진 적이 없었다.
어릴 때도 팔남매가 한옥집에 오밀조밀 살았으니 내 방이랄 게 없었다.
언니옷과 내 옷, 형제들의 책과 내 책도 뒤엉켜 지냈다.
결혼후 어느 날, 친정집 나들이에서 여고생, 대학시절 열심히 사 모은 영화잡지, 스크린이니, 키노니 하는 잡지들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가 아랫방 아궁이 불쏘시개로 좋아 다 태웠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내 방의 부재를 한탄했다. 수십 권의 90년대 잡지들에 얽힌 내 추억이 모두 재가 되어 사라진 거였다. 내 기억의 역사, 추억의 기록들이 생존해있을 안전한 방을 이제라도 만들어야 겠다 열망했다. 중학생 때부터는 시내에서 자취를 했는데 연년생 언니와 함께였다. 공부 잘하고 깐깐했던 언니는 주인 행세를 했다. 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나는 조신하게 눈치보며 살았다. 서울 올라와서도 혼자 벌어 대학 다니고 생활해야 했으니 늘 룸메이트가 있었다. 삼수 끝에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하고는 큰아들에 이어 작은 아들을 낳고 키우고 여기서 끝이다 싶었는데 막내딸을 하나 더 두느라 내 방 찾을 겨를도, 그걸 활용할 시간도 없었다. 내 방에 대한 열망은 그렇게 식어가는 듯했다.
막내딸이 다섯 살 쯤 안방에 화장대를 없애고 그 자리에 내 책상을 놓았다.
책상 앞 벽에는 리버 피닉스나 알 파치노의 사진, 피카소가 아홉 살에 그린 새 스케치가 인쇄된 엽서 같은 것들을 붙여놓았다. 한옥집 아궁이처럼 온기와 고유 영역이 돼 줄 스탠드도 놓았고 내 별자리를 상징하는 사자모형도 놓아두었다. 작은 나만의 세상을 방 모서리에 차려놓고 가슴이 뛰었다. 남편이 사다 준 라디오도 올려놓고 보니, 오래 잊었던 나만의 책상 위 우주가 재현되었다. 그 작은 책상위에서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썼다. 박완서의 '호미'를 읽었고, 박경리의 '토지'를 읽기도 했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몇 페이지의 에세이를 읽고 문장을 편애하듯 책에 밑줄을 긋고 싶지는 않아 일기장에 필사하는 밤의 평온과 달콤한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막내딸은 엄마가 책상위에서 뭔가 즐겁고도 특별한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았다.
자기 방에 더 넓은 책상을 두고도 굳이 안방 내 책상위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고 심지어 내 파우치를 늘어놓고 작은 손거울에 작은 얼굴을 들이밀고 립스틱이 망가져라 덕지덕지 바르기도 했다. 내 책상 옆 벽에 다섯 살 짜리 아이만한 긴 자락을 머리카락보다 더 늘어트린 스커트를 입은 라푼젤이 크레파스로 그려져 있던 날은 말문이 막혔다. 거대 라푼젤은 이사를 올 때까지도 안방을 지켰다. 안방에 내 책상조차 다섯 살 짜리 여자아이의 세상으로 점령당하고 말았다. 아이 셋의 유부녀에게 나만의 방을 가지는 일은 꿈처럼 여겨졌다.
그날은, 방송국 동료들과 단골카페에 긴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여섯 살이던 막내딸을 껌딱지처럼 데리고 다니던 때였다. 긴 테이블 한 쪽에서 고개를 숙인 채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스케치북 위에 사인펜으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달큰한 음료하나에 컵케익까지 대령해주고 그림에 몰두해 있었으니 나도 딸이 있는 것도 잊은 채 수다의 삼매경이 빠졌다. 각자 방송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 가족도 저버리고 혼자 어딘가로 여행을 간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나도 한 마디를 보탰다. 응축된 오랜 진심이 탄성으로 시작되는 고백이었다.
막내딸의 대꾸가 날아든 건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였다.
“그럴 거면 왜 나를 낳았어!”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처럼 발끈, 질문이 아니라 시비조였다. 아니, 놀란 왕벌이 쏘는 따가운 침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막내딸에게로 향했고, 잠깐의 침묵 끝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들도 잊고 있었다. 한 어미의 딸이 바로 옆에 있다는 사실을.
“그러게요, 왜 그러셨대요, 작가님?”
한 동료가 짓궂게 첨언을 했다.
내 대답만이 이 어색하고 아찔한 고비를 넘길 묘안이었다. 물러설 곳이 없는 절벽 끝에 선 것처럼, 휘청거리는 정신머리를 가까스로 부여잡고 나는 겨우 버젓이 내 옆에 살아있는 어린 오년짜리 생명에게 절망을 줘서는 안 되겠다는 일념으로 한마디를 할 수 있었다.
“너를 낳고 생각이 달라졌지.”
대답인지 비명인지 모를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 괜히 쓴 커피를 들이켜야 했다.
그러기에 옛 말 참으로 틀리지 않지, 아이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말랬다고.
<호수마을 나만의 방, 호수마을 근처에서 당근거래로 산 노란 스탠드와 결혼할 때 침구사업을 하시던 시어머니께서 혼수로 챙겨 주신 금색 싱글 침구를 시골고향집에서 굳이 챙겨와 내 침대를 꾸몄다.>
몇 년전 통영에 토지문학관에서 박경리 선생의 서재를 보게 됐다.
널따란 앉은뱅이책상에 안경과 연필꽂이 쓰다만 원고와 새 원고, 몇 권의 책들이 다였다. 방에는 책꽂이랄 게 따로 없이 곳곳에 책이 나름의 질서를 지니고 쌓여 있었고 벽에는 외투용 두루마기 한 벌이 언제든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주인을 기다리는 한 벌의 그림같았다. 세밀한 손길과 취향이 베인 작가의 방이었다. 책장을 꾸려 거창하게 책을 신봉하지도 않고 그저 필요한 만큼 읽고 접하고 동거하는 대범하면서도 자연스런 작가의 방이었다. 선생의 서재 사진은 아직도 내 노트북 앨범에 저장돼 있다. 내 방이 갖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 방을 바라보며 나에게도 나만의 취향이 서린 내 방이 생겼으면 하고 기도해왔다.
우연히 알게 된 호수마을 작가 레지던시 사업으로 나는 호수마을로 왔다.
에세이 집 하나 낸 나에게도 기회가 온 건 간절한 바람이 건넨 행운이었다. 작가 레지던시란 명패가 붙은 내 방은 긴 직사각형의 여덟 평 가량 되는 원룸이다. 옛 마을회관을 손 봐서 꾸민 작업실로 180일간 내게 허락됐다. 건물 유리 입구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으로는 갤러리이고 오른쪽으로 내 방문이 있고, 그 방문 벽을 따라 긴 복도 끝에 공용화장실이 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책상이 놓여 있다. 책상 오른쪽으로 골목으로 난 창문이 있고 그 창문 아래 일인용 침대가 있다. 왼쪽 끝 모서리 기역자로 싱크대가 있고 싱크대 위로 창문이 나 있다. 그 창문으로는 밤에 달빛이 낮에 햇볕이 스토프라이트처럼 비춘다. 무엇보다 이 방이 마음에 드는 건 천고가 높다는 거다. 이미터가 훨씬 넘는다. 다만, 지금 같은 겨울에는 춥다. 수족냉증이 있는 중년 여자에게는 더더욱.
딸아,
이제와 고백컨대, 너를 낳고 생각이 달라졌단 말은 말이었지 진심이 아니었다.
너를 낳고도 내 그런 열망은 더 강해졌단다. 엄마는 오십에 떠나 온 호수마을 나만의 방에서 너에게 건넨 그 때 대답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도 고백해야겠다. 아마 넌 그 때 이미 빈 말임을 알았을지도 모르겠구나. 눈치 빨랐던 너는 이후로도 내 마음을 간파하는 말 화살을 쏘곤 했지. 아버지와 싸우고 집에 돌아온 날은 “엄마, 아버지가 어디서 교통사고라도 났을까 불안했어 라거나, 유치원 버스에서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엄마, 뭐 슬픈 일 있어? 두 눈을 빛내며 내 눈이 아니라 마음속을 들여다보듯 물었지. 그러면서 어제 설령 슬픈 일이 있더라도 오늘은 웃이라는 철학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 엄마, 아버지와 그 시절 자주 다퉜고 이혼밖에 이 갈등을 끝낼 일은 없다고 생각했어. 그런 저의를 들킨 것 같아 아니라고 거짓말 하면서도 가슴이 철렁 했었어. 이 아이는 어른의 진심을 읽는구나. 어린 딸은 엄마의 무의식에 닿는구나. 나는 너에게 여러 거짓말을 했구나. 이젠 십대가 된 너는 오십 중년에 이른 엄마의 내밀한 속사연 따위 상관 않겠지만. 너 역시 그 때처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은 엄마 자신을 위해서 떠나야 할 때라는 것을. 그건 미루거나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타고난 너의 직감으로 이미 알 거라고 믿어.
<오늘의 필사>
...망설이거나 어설프게 굴면 당신은 끝장이예요. 오직 뛰어넘는 것만 생각해요. 나는 그녀의 등에 내 전 재산을 건 것처럼 애원했습니다. 그녀는 한 마리 새처럼 장애물을 넘었지요. 그러나 그 너머에 또 다른 장애물이, 그 너머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버틸 힘이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박수소리와 고함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메리 카마이클이 천재가 아니라, 침실 전용 거실에서 이제 첫 소설을 쓰고 있는 이름 없는 소녀라는 사실과 게다가 돈과 시간, 여유 같은 바람직한 여건도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을 감안하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 100년의 시간을 주자고, 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며 결론 내렸습니다. ..그녀에게 자기만의 방(부연:자물쇠가 달린, 스스로 생각을 하는 힘)과 연간 500파운드(부연:깊이 생각하는 힘을 위해)를 주고, 마음속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주자고, 그리고 지금 쓰는 글은 반쯤 덜어내도 내버려 두자고요. 그러면 그녀는 머지않아 더 나은 책을 쓸 거라고 말입니다. ...100년 뒤에 그녀는 시인이 될 거라고요....>
- 자기만의 방 190쪽 중에서.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혜원 옮김, / 더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