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조 브랜드 CFO 17편:
ERP:보이지 않는 근육

by Lucky Nine
“회계는 숫자를 적는다. ERP는 회사를 설계한다.”


“ERP요? 우린 아직 그럴 규모는 아니에요.”


ERP 도입을 처음 이야기했을 때,
사무실 안 공기는 확실히 싸늘했다.

“ERP는 제조 대기업이나 쓰는 거 아니에요?”

“지금도 엑셀로 잘 되는데 굳이요?”

“그거 도입하면 일만 늘잖아요…”

“그건 재무팀이 필요한 거지, 저흰 딱히…”

특히 개발팀과 마케팅팀은
ERP라는 단어에 ‘속도 저하’, ‘감시’, ‘일 복잡해짐’이라는
이미지를 곧장 덧씌웠다.

영업팀은 “채널간 인터페이스부터 복잡할 것”이라 말했고,
브랜드팀은 “유연성이 떨어진다”며 반대했다.
심지어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린 감성으로 승부 보는 브랜드인데, 무슨 시스템으로 회사를 운영하나요?”


하지만 CFO는 숫자를 넘는 흐름을 본다


나는 ERP를 단순히 회계 편의성을 위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ERP는 흐름을 정리하고, 책임을 명확히 하며,

결정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만드는 프레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매출이 오르기만 하면 괜찮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

어떤 제품이 진짜 이익을 내고 있는지

어떤 유통 채널이 자금을 가장 오래 묶는지

마케팅비가 실제로 수익에 기여했는지

우리는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재고는 늘고, CS는 쌓이고, 자재는 늦었다


ERP 이전의 공급망(SCM)은 부서별 ‘각자도생’에 가까웠다.

영업팀은 대형 프로모션을 잡고

생산팀은 뒤늦게 캘린더를 보고 당황하고

자재팀은 지난 시즌 발주 데이터를 복기하고

물류팀은 납기 압박에 시달리고

CS팀은 재고 정보 없이 고객과 싸워야 했다


문제는 반복됐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

왜냐면 흐름이 없었고, 연결이 없었기 때문이다.


ERP는 공급망을 재무의 언어로 연결하는 도구다


ERP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회사 전체의 움직임이 달라질 것이다.

생산 계획이 실시간 판매 예측과 연동되었고

자재 발주는 실수요 기반으로 조정되었으며

유통별 출고 내역과 반품률이 분석 가능해졌고

정산 지연, 납기 누락, CS 병목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CFO인 내 입장에서 의미 있었던 건,
SCM의 흐름이 숫자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제품별 단위 원가가 실시간으로 계산되고

유통채널별 수익기여도가 명확해지고

프로모션 참여로 인한 손익 시나리오가 도출되며

자금흐름과 재고회전이 연결된 리포트가 생겨났다


숫자가 아니라,


숫자 너머의 회사 움직임을 보게 되다

이제 우리는 묻는다.
“이 채널, 팔긴 많이 팔았는데… 정말 이익이 났나?”
“이 SKU는 왜 잘 나가는데 현금이 안 남지?”
“이번 프로모션, 유입률은 좋은데 전환은 왜 낮지?”

ERP는 단순히 정보를 정리한 것이 아니다.

정보를 통해 질문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질문이 우리의 의사결정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다.


마무리하며


ERP는 보고서 출력을 돕는 시스템이 아니다.
회사의 근육을 정비하고,
브랜드의 체력을 키우는 구조다.

감성으로 설계된 브랜드일수록,
뒤를 받쳐주는 흐름은 더 단단해야 한다.

ERP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걸 움직이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근육’**이다.

그 근육이 약하면,
제품이 아무리 뛰어나도
브랜드는 멀리 가지 못한다.


다음 편 예고

ERP는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어려운 건, 사람이고 책임이었다.

전사 프로젝트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사하듯이 버거워졌다.

색조 브랜드 CFO 18편: 전사 프로젝트는 ‘전사’해야 한다
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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