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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May 05. 2024

다정소감

내가 살아가는 방식은 가식인가

 

<김혼비 작가의 다정소감 - 가식에 대하여>를 읽고


  일반적으로 친한 친구나 동료, 나와 잘 지내는 사람이 하는 행동은 가식이라 느끼지 않고, 나와 친하지 않은 사람, 라이벌의 관계에 있는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 가식적이게 느껴진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의 태도는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가식의 경계는 내가 생각하는 것에 따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고 생각한다.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일들은 본의의 성품대로 발현된다.

편한 사람이거나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그렇고 상사를 대하는 경우에도 그렇다.

또한 분위기에 이끌려 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대중 심리가 한 예이다.

보통은 군중심리에 휩쓸려 대중적인 방향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식은 그가 선택하는 방향과 환경, 상황 그리고 나의 성품이 어우러져 나올 수밖에 없지만 악의가 없고 순수한 의도라 하면 가식적이라고 볼 수 없다.

 예를 들면 아주 마음에 드는 이성이나 선생님께 잘 보이려 하는 행동은 가식이나 거짓이 아니다.

당시 느껴지는 감정에 따라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가장 충실한 표현 방식이지만

다른 사람이 보았을 땐 가식처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가식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누구의 마음이 가장 가식일까? 어떤 방식에서 가식이고 가식이 아닌 것이 되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가식을 그저 눈꼴시린 상황이라고만 판단하게 되었을까?


좋아하는 이성 앞에서의 행동과 친한 친구에게 하는 행동이 다르다면 과연 가식과 위선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다. 가장 최선의 방식으로 이성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기에  예쁘고 멋진 모습과 행동, 말투 등으로 나를 나타내려 하는 것이다.


 가식과 위선은 예의와 배려를 포함한 최소한의 상대방을 생각하는 마음이 합쳐진 것이다.

이러한 가식과 위선이 없다면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고 해도

오히려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악이 되어 집요하게 표현하게 될 테니까.

마치 스토킹처럼 따라다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서로에게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된다.


사람의 성품대로, 배워가는 대로 함께 이어져 가야 하는 것은 솔직함을 빙자한 깎아내림과 못된 마음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그들을 향해 선의를 품어내는 마음일 것이다.


세상 안에 있으나 세상 일에 쉽게 휩쓸리지 않고 사소한 것도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눈을 통해 곧곧에 다정이 녹아 있는 책 안의 말들이 내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가식은 말처럼 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잘 보이고픈 최소한의 선의가 숨겨져 있다.

가식이 없다면 우리는 서로 막무가내인 행동과 말투, 집요함으로 끝내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좋은 사람은 선의를 가질 때 타인을 향해 비로소 나오는 위선과 해학을 향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리하여 위선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도 없다.


위선이 사라진 본성만이 남은 세상은 오히려 혼란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배우고 있는 것이다.

자라가면서 만들어가는 것들로 내가 되어 가고 이내 소중해지며 더불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우리가 되어가나 보다.




서로에게 끝까지 좋은 사람이고자 하는
노력과 노력이 만나 빚어내는
존중과 다정이 존재했다.
가식이 섞여 있다 한들 그러한 태도를 오래 유지한다는 것을 보면
가식이 아니라 그냥 성품이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60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의도가 없는 한 가식에는
지금 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고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에 이르고자 하지만 아직은 완전치 못해서
'가식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과정.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p. 63


보통 내 안 어딘가에 '진정한 나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나는 그 '나다움'을 발견하고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나다움'의 상당 부분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나, 만들어진 나, 만들어져가고 있는 나, 모두 나이다.
'본캐'도 '부캐'도 다 나.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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