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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May 14. 2024

일요일의 소리

온전한 귀 기울임


 일요일의 공기가 신선하다. 문을 열고 밖을 나온다. 아침 새소리는 청량하다. 먹이를 물고 온 소리인지, 비가 올 예정임을 알리는 소리인지 가득 머금은 소리는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꽃 사이로 호각 소리처럼 비어져 나온다. 초록의 인내는 절정을 달하여 5월을 알리고 어제 보아 둔 딸기 넝쿨과 귀여운 아기 딸기의 연둣빛도 그대로다. 마당 뒤편 텃밭에 심어진 작물이 저마다 아우성 거릴 준비를 한다. ‘쑥쑥’ 자라나려 용케도 일어난다. 만물을 깨우는 아침의 소리는 자신만의 색으로 살며시 그리고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모든 소리 귀 기울일 때 더 잘 들린다. 나뭇잎 사각거리는 바람의 소리, 새들이 날아갈 준비, 땅을 부둥켜 안아 기지개를 켜며 슬며시 달아나는 고양이, 멀리 향긋하게 전해지던 아카시아 향기, 시골에 닿은 사이 밤 중에 노닐던 어질러진 마음을 잡아줄 가장 조용한 소음은 아침이다.      


 ‘탁’ 버너에 물을 끓인다. 비 오기 직전 하늘은 수분을 머금고 있다. 물 끓이는 소리가 이내 보글거린다. 커피 봉지를 뜯어 잔에 ‘치익’ 비운다. 검은색으로 물들어간 머그잔에 눈이 간다. 어딜 가도 함께 하니 절대 나를 놓아줄 리 없는 요물임이 틀림없다.


 남편과 시골 정취를 느끼며 커피 한잔 하는 시간이 재미있다. 벤치에 앉아 마시는 커피 맛은 일품이다. 서서히 커피 한 모금이 온몸 곳곳에 퍼지며 에너지가 채워지는 소리가 들린다.      

커피와 함께 집중하던 자연의 소리는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면서 서서히 잠긴다. 이제 엄마 역할을 할 시간이다. 비가 올 예정이라 외부 일정은 소화하기 힘드니 가까운 거리의 목욕탕을 가기로 결정했다. 군대 간 아들도 마침 휴가를 나올 예정이라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합류하기로 했다.    

  

  이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목욕탕 가기 전 부침개를 먹고 출발 예정이라 부리나케 준비한다. ‘비가 오는 날에 부침개라니’ 그것도 캠핑하면서 말이다. 해물과 김치를 잔뜩 넣고 달걀 2개를 탁 풀어 넣는다.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섞어 프라이팬 가득한 기름에 둥글게 원을 그려 넣는다. 빗소리는 기름과 전이 만나는 소리와 맞물려 금상첨화다. 이 훌륭한 조합은 어디서 어떻게 나오게 된 소리인가! 아이들이 옹기종기 테이블에 모여 앉아 ‘앙’ 한 접시를 시작한다. 젓가락 부딪는 소리는 맛있다는 소리이다. 모여 앉아 먹으니 혼자 먹을 때보다 더 맛있다. 비워진 그릇에 부침개 하나가 더 들어간다. 지글지글 소리가 바빠진다.  

    

 아들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상봉이라 가장 맛있는 부침개를 부쳐낸다. 마지막은 아들 몫이 되었다. 비가 조금씩 길어지고 내리는 소리마저 두꺼워진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차 안에 울리는 빗소리와 유리창에 흐르던 소리는 오늘도 맑음이다. 오랜만에 여섯 가족은 완전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가 와서 그런지 초정약수원탕에 사람이 많다. 비의 추적한 공기와 목욕탕 냄새가 참으로 정겹다. 어린 시절 다니던 목욕탕의 추억이 입구부터 생생하게 떠오른다. 성인이 되면서 목욕탕은 방문 제외 대상이고 결혼 후 아이들이 어릴 때 가끔 갔었으나 그마저 코로나가 발목을 잡았으니 참으로 오랜만이다. 막내는 벌써 신이 난다. 워낙 물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주 아기 때 방문 이후로 처음이니 기대가 큰가 보다.

 여자 넷, 남자 둘은 입구에서 각자의 영역으로 헤어진다.

      

 “몇 시에 만날까?”

 “두 시간 뒤에 봅시다.”

“먼저 나오면 기다리기. 인원이 많아 우리가 더 오래 걸릴 수 있으니까요.”     


 성인이 된 딸과 막내까지 모두 함께하니 참으로 좋다. 큰딸은 집에서 샤워할 때 문을 잠그고 가끔 때를 밀어주려고 해도 기겁하며 질색을 하니 그 모습에 비하면 지금 방문은 아주 큰 행사이다. 여탕 문을 열고 옛날 엄마가 해 주던 방식대로 부리나케 자리를 잡고 물을 뿌리고 막내부터 씻긴다. 냉탕에 들어갈 준비가 완료된 아이는 둘째 언니와 함께 곧바로 직행이다.


 내리는 물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 더운 김이 뿜어진 공기는 탕 안에 고이 고인다. 민낯이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소리다. 가장 자연스럽게 만나는 목욕탕 소리는 정겨움이다. 큰딸과 내가 온탕으로 살며시 들어간다. 조금은 숨찬 기운이 가슴께로 탁 밑으로 차오르고 나서야 조금씩 안정된다. 마주 보며 한 번씩 웃어넘기는 시간이다.     


 때수건과 비누, 아이들의 등을 밀어주며 그 소리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이라 느낀다. 그 사랑이 너무 진해 피부가 예뻐지도록 밀다 보면 아프다고 손사래를 친다. 예전에 나도 아프다고 생떼 부리면 엄마는 뭐가 아프냐며 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로 밀어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싫지만은 않은 추억의 에피소드다. 가장 힘이 좋을 때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지금 아이들을 보니 그때의 내 모습과 겹친다.      


  뒤에서 밀어주는 것은 아이가 잘 자라도록 온 마음으로, 몸으로 지켜내는 사랑이나 가끔 그 사랑이 너무 진해지면 피부가 벗겨지는 것처럼 아프기도 하다. 무엇이든 적당한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자녀를 사랑하되 내 기준으로만 당겨내지 않고 잘 밀어주는 방법을 목욕탕에서 귀 기울여 듣는다.    

  

 온전히 들은 일요일의 소리는 귀 기울임이다. 모처럼 느낀 여유로운 하루는 다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내가 듣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기는 어려우나 단 하나를 듣더라도 소중히 들어보는 마음의 귀를 살포시 열어본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다. 자연의 소리가 가장 자연스럽고 그 안에서 함께 좋은 말들을 엮어간다면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가 서로에게 풍성해질 것이다.      



P.S. 캠핑장 가는 대신 어느 한 농장을 방문해서 단독으로 캠핑을 즐긴 날이다. 기쁘게 맞이해 주신 샤인머스캣 농장 주인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올해 농장 체험장을 오픈할 예정이고 막바지 준비가 끝났다고 하셨다. 올해 여름이 기다려진다. 아이를 데리고 다시 방문하고 싶다. 그때 샤인머스켓은 튼실한 과실로 알알이 예쁘게 맺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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