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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아 Oct 02. 2024

나들이가 내게 준 것

익어가는 계절을 마주하다. 그것은 행복

 여름은 충만하다. 그렇게 충만해질 대로 차오른 여름이 비껴가기 시작하니 가을에 어울릴 빛깔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충만해질 여름을 익혀낼 계절은 나무에게 먼저 찾아와 잎 끝부터 녹여내기 시작한다. 여름의 마지막을 잘 안아가 가을을 살며시 열어 내 이 계절을 몸으로 느껴 본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것이  총총 매달려 있다. 가을은 깊어가는 만큼 이해를 품어가는 계절이다.      


 일이 있어 외출한 가족을 제외하고 나는 딸아이 둘을 데리고 근처 호수공원으로 나들이를 갔다. 햇볕은 아직 뜨겁지만 요란하지 않은 땀은 금세 식는다. 그러고 보니 가을의 온전한 날씨는 그늘로부터 시작되고 있나 보다. 햇살에 아랑곳하지 않는 바람은 이미 녹음 사이에 머물러 풍성해진 그늘의 소리로 다가온다. 가슴까지 트일 정도 시원한 공기를 내어 준다.


나무 그늘 사이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깔았다. 가지고 온 간식거리와 책을 내려놓는다. 신발을 벗고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역시 밖에서 먹는 음식은 무엇이든 꿀맛 같다. 어느 음식이든 바람과 만나 맛있는 맛을 풍긴다. 냄새는 식욕과 함께 먹는 재미를 더한다.  

    

 과자를 먹는 소리가 귀청에 들리니 한 나절의 하늘은 깊어진다. 유난히 파란 하늘이 꼭 바다와 같다. 멀리 수평선이 보이지 않지만 높이 뜬 구름은 파도처럼 일렁이며 풍성해진다. 하늘을 이고 돗자리에 눕는다. 자리에 누운 것으로도 진정한 휴식이 된다. 쉬어갈 시간이 여기에 머물러 고이고이 눌러앉는다. 나무 사이 햇빛이 찬란히 빛나고 파란 하늘로 마음이 편안해지니 역시 사람은 땅과 자연과 호흡하며 사는 것이 틀림없다.      


 

초록 사이 비집고 온 하늘


누워 있던 은솔이가 뙤약볕으로 뛰어간다. 분수가 나오는 곳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가 손을 시고 돌아온다. 여벌 옷을 가지고 오지 않아 손만 대고 있지만 물살의 시원함이 그래도 좋은가 보다. 반복되는 움직임으로도 쉽게 에너지가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힘은 우리의 것과 얼마나 다른지 도저히 어른이 당해낼 재간은 없다. ‘후루루’ 물살을 튕겨 내니 햇살이 거기에 곱게도 머문다. 건조하지 않은 공기가 미스트처럼 퍼지니 그마저도 기분 좋은 흩뿌림이다. 몇몇의 어린아이는 아예 분수에 온몸을 적시고 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호기심을 그대로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아이들이 오히려 부럽다. 나를 적시기에는 여러 가지 제한 변수는 너무나 많다. 어른이 아이처럼 분수에서 노는 꼴이라니 색다르게 바라볼 시선을 미리 걱정하는 자체도 잘못된 선입견으로 인한 비행위의 실천이다.     

 

 가지고 온 인라인 스케이트를 은솔이가 갈아 신고 호수공원 광장을 신나게 달리기 시작한다. 호수공원에 온 취지가 이것이었으니 오늘의 목적은 이룬 셈이다. 휴일에 모든 가족이 여기에 함께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런대로 아이의 놀이를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나름의 만족이 샘솟는다. 은솔이가 빙빙 돈다. 펼쳐진 하늘을 따라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한참을 쳐다본다. 멀어질 듯 조그맣다가 다시 가까이 다가오는 얼굴을 마주한다. 그때마다 쳐다보는 눈이 참 예쁘다. 은솔이 눈 안에 고이 품은 하늘과 바람과 초록의 나무는 점점 넓어진다. 땀을 흘리는 열기는 달리는 속도와 비례하여 햇살과 바람이 적당하게 넣었다 빼는 모양새로 달음박질한다.


인라인 스키이트 타는 꽃이 누군고


 간만의 나들이로 우리는 시간의 추억을 함께 달린다. 아이가 인라인 스케이트 타는 동안 나는 돗자리에 다시 누워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적당한 바람과 적당한 그늘이 독서의 힘을 더하니 이보다 기쁠 수가 없다. 나태주 시인의 ‘버킷리스트’ 시집을 읽는 내내 눈에 박힌 하늘이 독서의 맛을 배로 더한다. 역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 불릴 만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함이 쉬어가는 자리로 오롯이 들어와 몰입의 순간이 즐겁다. 


      
가볍게
                         
                  나태주

모르는 것도 가볍게
처음 해 보는 이로 가볍게
낯선 사람하고도 가볍게
낯선 곳을 찾을 때도 가볍게
익숙한 일은 더욱 가볍게
그렇게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꽃들아 안녕

                  나태주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 번 옳다



혼자서

                          나태주

무리지어 피어 있는꽃보다
두 셋이서 피어 있는 꽃이
도란도란 더 의초로울 때 있다

두 셋이서 피어 있는 꽃보다
오직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이
더 당당하고 아름다울 때 있다

너 오늘 혼자 외롭게
꽃으로 서 있음을 너무
힘들어 하지 말아라

누워서 책 읽기



때마침 공연 준비하던 버스킹 팀이 마이크 테스트를 마치고 음악의 선율을 드리우기 시작다. 인라인 스케이트 타는 아이의 뒤로 박자가 성큼성큼 달려가더니 온몸으로 음과 취해 논다. 책을 읽던 나의 귀도 선율이 날아와 꽂힌다. ‘스르르’ 앉은 자리는 음과 이내 하나가 된다. 공원을 울리는 노래는 귀에 익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비추며 넘나들기 시작한다. 각자의 움직임이 음악과 너무나 잘 맞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또다시 느낀다.  


 뜻하지 않은 음악의 선율과 자연 안에서 이룬 독서라니, 그리고 아이들과의 즐거운 데이트까지라니, 고급지거나 거창하지 않은 일상이지만 덤에 덤을 가득 얹어 받아간 선물인 것만 같다. 선물을 살며시 열기까지 비밀스러운 기대는 기쁨으로 차오른다. 충만함을 열어낸 순간 마음은  ‘폭’ 익어간다. 보내온 정성을 열어본 순간 감사한 마음은 벅찬 감정으로 드리워진다. 특히 내가 무언가를 기대 없이 주었을 때 더할 나위 없이 기쁘다.


행복이 크기는 물질이 아니라 마음의 열고 맺음이 풍성하게 일어날 때 깊은 여운을 남긴다. 오늘 아이들을 위해 시간을 내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커졌다. 주려고 보낸 시간인데 오히려 내가 채워진다. 채워진 시간만큼 가을의 빛은 그렇게 익어간다. 참 고운 빛깔이다.       


발 아래 드리운 것은


이보다 좋을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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