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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이 좋아서, 여름

청춘의 빛깔

by 현정아

초록이 좋아서


Chapter 2. 여름, 선명하게 부서지는 햇살의 밀도


여름비가 내린다. 차창, 차 지붕을 드럼처럼 울리는 빗소리의 장단. 그 소리를 들으며 운전하는 것이 좋다. 빗소리에 맞춰 Allen Walker의 <더 드럼> 음악을 듣는다. 빗소리와 어우러진 목소리가 드럼을 두드리듯 공간을 깊게 메운다. 구석구석 울리는 음악은 비를 보는 나의 모습을 감싼다. 젖어드는 것은 차창 밖의 나무와 식물, 세상만이 아니다.


https://youtu.be/6cv_M1zjpn4?si=lVMJvF5uYYam6pYR

the drum의 비트를 따라 여름은, YOUTUBE 출처


흠뻑 빠진 마음이 잔잔하게 물결친다. 거꾸로 창을 타고 오르는 비를 눈으로 실컷 보며 귀를 기울이는 그 소리 자체로도 훌륭한 음악이 된다. 비와 음악은 이처럼 여름을 고급스럽게 아우른다. 보편적인 가치를 소소하지만, 가장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태양만이 여름을 장악하지 않는다. 때론 흐린 날 내리는 비의 이름만으로도 근사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선명하게 부서지는 햇살의 밀도는 비의 주어짐 뒤에 흩날리는 따스함인지도 모른다. 비가 그치면 청명하게 말려주는 햇살이 세상 곳곳을 비춘다. 아주 작은 풀잎의 이파리 끄트머리로부터 줄기, 꽃의 이슬에게까지 광합성을 하게 한다. 여름은 짙은 청록을 이리저리 내뿜으며 생기가 돌게 한다. 계절마다의 예술이 때마다 시작되는.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여름.
정원은 마치 누가 마법을 휘두른 듯 황홀한 아름다움이 펼쳐진다. p.70
생명체가 발하는 여름의 향기


여름을 보듬는 정원 집사의 계절 이야기는 여름의 강한 밀도만큼이나 분주하지만 가장 깊은 계절의 환희를 가져간다. 여름의 정원은 장미 이야기가 많다. 5월이면 내가 사는 아파트 담장 둘레길에도 빨간 장미가 의연하게 피기 시작한다. 어느새 활짝 핀 장미의 이름은 여름만큼 강렬하다. 빛깔이 지닌 고고함만큼 아름답게 펼쳐진 길은 부지런한 봄의 생기를 이미 머금어 가장 긴 해를 담뿍 받아낸다. 바로 축제 같은 열정이 펼쳐진다.

장미 집사의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노고 끝에 얻어지는 아름다움과 향기는 치명적이다. p.78


보기에 예쁜 장미지만, 사랑의 계절 따라 열정의 여름을 알리는 꽃이지만 키워내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작가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된다. 그동안 꽃집에서 쉽게 얻은 꽃들은 아름다움만큼이나 귀한 땀과 노력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내가 키워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모른다.


정원을 가꾸는 작가의 여름 이야기는 쉽지 않은 길 위에 놓인 오랜 기다림이었다. 노고 끝에 피어난 한 송이 꽃만으로도 그동안의 험난했던 여정을 녹아들게 하는 향기와 빛깔.


어쩌면 그 색은 우리가 걸어가는 동안 나를 채워내는 색인지도 모른다. 과정마다의 기다림과 마음 씀씀이가 빛을 발하기까지. 내가 어떤 향기와 색을 지닌 사람인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무수한 실패는 나에게 산뜻한 체념을 가르쳤다.
뭐,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지.
안 되는 건 받아들이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 않을까?
그건 내가 실패에서 연상했던 절망이나 열패감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어떠한 희망이었다. p.84


실패는 시작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실패하면 어쩌지? 내가 할 수 있을까? 머뭇거리게 하고 망설이게 만든다. 자신감을 떨어뜨린다. 첫 실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다. 책에 놓인 정원 일을 통해서.


어떤 일들은 맘처럼 쉽지 않다. 작은 땅을 일구고 싹을 틔워내고 줄기를 보듬고 꽃을 피우기까지 온 우주의 인내를 안아가야 한다. 틔워내기조차 어려운 일 앞에 낙담하고 실망하기보다 받아들임이 필요함을 알게 된다. 산뜻한 체념.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이었다.

“자연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내년을 위해 다시 해봐야지.” p.84
뭐, 아니면 말고! 산뜻하게 체념하는 것도 방법이니깐. p.85
실패의 무게감을 털어내는


I have not failed.
I’ve just found 10,000 ways that won’t work.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다.
나는 효과가 없는 10,000개의 방법을 발견한 것뿐이다.

Thomas Edison 토머스 에디슨


10,000번의 시행착오와 반복, 긍정의 도전, 실패를 실패로만 넘기지 않는 정신을 여름의 계절을 통해 읽는다. 에디슨의 받아들임은 또 다른 시작의 무수한 반복이었다. 실패라는 단어 하나로 이어진 에디슨의 명언이 불현듯 떠오르게 되는 이것이야말로 실패를 바라보는 정원 집사의 마음가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태양이 직선으로 내리 꽂히고 풀과 나무는 위로, 더 위로 솟구치는 여름.
직진밖에 없는 계절, 나의 청춘도 그랬다.
부딪치고 넘어져 눈물 흘렸지만 이내 일어나 앞만 보고 달려 나갔다.
타들어 갈지언정 기죽지 않고 초록을 뿜어내는 나무처럼, 나도 지지 않고 불탔다. p.90


나의 청춘이 기억 안에서 여름을 달린다. 멋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때의 최선이었열정이었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소리친다. 가끔은 두렵기도 하지만 시절을 견딘 우리의 모습이 계절 안에 있다. 요새 젊은 친구들을 보면 풍기는 모습만으로도 느껴지는 에너지가 다르다. 그 안에 많은 감정과 고민을 담고 있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초록을 거머쥐고 있다.


청춘은 강한 에너지만큼 푸릇한 생기가 시작되는 나이다. 여름은 청춘의 계절,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는 계절, 타들어 가는 갈증만큼이나 그늘을 드리울 수 있는 시절을 담는다. 그래서 청춘의 빛깔이 가장 핫한 계절을 ‘여름’이라 칭하나 보다.

그래도 힘들 땐 쉬어가자.


청춘의 빛깔
빽빽이 채우기보다 여백을 마련하기.
전력투구보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사부작거리기.
시간도 공간도 에너지도, 조금쯤 여유롭게 남겨 두기.
정원을 가꾸며 되새긴 세상의 이치다. p.107

그래서 청춘은 솎아내기의 계절인가 보다. 무수한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해 나를 만들어가는 계절이다. 뭐든 과하면 해가 된다. 적당히 비워내고 어떤 것은 과감히 털어내야 한다. 그래야 다음을 이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마음 안에도 비워진 공간을 따라 새로운 마음이 들어선다. 그 새로운 마음이 긍정이 되도록 초록이 빛을 발한다.


각자가 가진 인내 안에 여유를 호기롭게 담아갈 수 있는 여름이기를.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나의 색깔을 그려나갈 수 있는 여름이기를.


더하기와 빼기
나무가 뻗어가는 만큼
남겨야 하는 것
열매 따라 익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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