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기적이지
공장 미싱공이었던 나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그리고 혼자 어린 딸을 키우는 미혼모였다.
미싱공 미혼모가 알코올 중독자였으니 어떤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절망뿐인 시절이었다.
공장에 출근해야 했던 평일에는 소주 1병.
그리고 휴일에는 아이를 동네 교회에 보내놓고 아침. 점심. 저녁. 밥을 먹듯 소주 3병을 꼬박꼬박 마셨다.
아이를 교회에 보낸 이유는 술 마시고 싶은 알코올중독자 미혼모가 아이를 맡기기엔 그만한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맨 정신으로는 살 수가 없을 정도로 나의 육신과 마음은 피폐해져 있었다.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가난과 외로움으로 늪을 이루고 있는 현실을 만나니 절망이 되었고, 그 절망은 나를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었다.
나의 모성과 책임감은 강하지 않다는 자책은 나를 바닥으로 몰아넣었고 더 이상 살고 싶지도 않고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극적으로 나를 잡아준 이는 7살 된 아이였다.
공장에서도 해고되고 술 취한 일상들이 계속되었지만 이 절망의 끈을 잘라낼 수 있는 힘과 에너지도 없었고 방법도 몰랐던 나는 아이의 엄마가 되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나의 딸은 나의 딸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고 나를 잡고 있었다.
입양을 앞둔 7살 딸의 마지막 소원으로 처음으로 간 교회에서 비로소 한줄기 빛을 보게 된 나는 지금까지 내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다.
물론 몇 번의 기도와 예배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지만 그 수많은 에피소드들과 사건사고를 이루고 있는 나의 이야기 중 가장 핵심은 기적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통해 일어났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이름은 킬레오(kileo).
'술 취한'이라는 뜻이다.
술 취한 인생에서 벗어난 지 20여 년 만에 이제는 아예 술 취한 마을의 주민이 된 셈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마을 이름이 '술 취한'일 수 있지?
어떻게 그런 이름을 갖다 붙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술 취한 마을은 음란. 벌거벗은 (Uchira) 마을 이름에 비하면 애교일 수도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마을 이름에 의문도 불만도 품지 않는다.
'그게 뭐 어때서?'이다.
아이러니한 것이 이 마을은 술을 금지 시키는 무슬림 마을이다.
술 취한 마을답게 술병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보건소 건축이 한창인데 술 때문에 나오지 않은 인부들은 예사다.
전날의 숙취가 아니더라도 말도 없이 나오지 않는 인부들도 예사다.
돈이 있으니 술을 마셔야 하니까.
인부들의 잠수 때문에 분통 터져하면 그럴 수도 있지 화낼 일이 아니라고 한다.
지난주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도통 모습을 볼 수 없는 하미시가 걱정이 되어 집에 가봤더니 아이가 집 앞에서 힘없이 앉아 있었다. 아파서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가 아프냐고 했더니 아버지한테 맞았단다.
술에 취한 아버지한테 맞아서 곳곳에 멍이 들어 있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가 가여워서. 폭행을 저지른 아이의 아버지에 화가 나서. 무엇보다 아무 힘이 되어주지 못했던 것이 미안해서.
그런데 오히려 아이가 나를 위안한다.
함나시다(hamna shida)라고.
"괜찮아요."
억장이 무너졌다.
“이건 괜찮지 않아. 아프고 힘든 거란다.”
번역기를 통해 나의 마음을 전했지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면서 괜찮다고만 한다.
마음 같아서는 아이를 데리고 오고 싶었지만 까딱 잘못하면 아이 납치 죄로 추방될 수도 있다.
당장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안고 기도해주는 것뿐이었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고 아이와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전기도 들어오지 않은 허허 들판 띄엄띄엄 있는 집들만이 전부인 풍경의 술 취한 마을이 예전 그 어떤 희망도 없는 술 취한 나의 모습을 닮았다.
절망이 되면서도 '언젠가 이 마을도 바뀔 거야. 나처럼.'라는 희망을 가져본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하원길의 유치원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하원을 하고 있다.
동네가 떠나가도록 악을 쓰듯 노래를 하는 아이들은 킬레오 술 취한 마을의 그레이스(grace) 유치원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모두 다 학교에 오라고 한다. 와서 읽고. 쓰고 노래를 부르자며 동네를 깨우는 아이들의 노래가 하미시 생각에 아픈 나의 마음을 위로해 준다.
술 취한 마을의 희망은 바로 이 아이들구나.
예전 술 취한 나의 희망이 나의 아이였던 것처럼.
50여 명의 유치원생 중 90% 아이들이 무슬림 가정의 아이들이다.
가난한 술 취한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낸다.
기독교 선교사가 운영하는 유치원이라고 해도 개의치 않는다.
동물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변변한 책상과 의자 없는 마을의 열악한 유치원에 비해 월등하게 좋기 때문이다. 프로그램과 간식 또한 비할바가 못된다.
입에서 입으로 바람처럼 퍼져나간 좋다는 소문은 이미 마을 사람들이 다 들었다.
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번듯한 건물에 깨끗한 화장실은 물론이고 책상과 의자와 칠판이 갖추어진 교실에서 교재로 공부하는 유치원은 탄자니아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는 흔히 볼 수 없을뿐더러 양질의 간식까지 주고도 한 달에 식비 만실링과 일 년에 교재비 만오천 실링 외 수업료가 무료이다 보니 서로가 보내고 싶어 하는 유치원이 되었다.
아이들은 이곳에서 잘 먹고, 마음껏 뛰어놀고 세상에서 꼭 필요한 지식의 기초를 배운다.
그리고 선교사님을 통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받는다.
그렇게 배우고 익히고 사랑을 받은 아이들이 술 취한 마을의 유일한 희망이다.
거친 광야와 같은 술 취한 땅에 울러 퍼지는 아이들의 노래가 희망과 사랑의 싹이다.
과연 뿌리가 내려질까, 열매를 볼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하고 회의에 빠질 때도 있겠지만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희망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결국에는 ‘kileo’를 ‘Grace’가 덮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그렇게 할 것이다. 라고 다시 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