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40 댓글 1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함께 지어져 가는 중

Being Built Together

by 샤론의꽃 Mar 18. 2025
브런치 글 이미지 1
브런치 글 이미지 2

마침내 쉘터의 기초를 다진다.  

지하 깊숙한 곳에서 물이 터진 바로 곁이 오갈 데 없는 미혼엄마들과 아이들의 피난처. 쉘터가 되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출산을 앞둔 미혼엄마들이 보호를 받으면서 살면서 아이를 낳을 것이다. 

 30여 년 내가 그랬던 것처럼.      


32년 전 나는 춘천의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미혼모 시설에서 아이를 낳았다. 

당시 한국에는 수많은 미혼모 시설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미혼모 시설의 입소 조건은 입양이었다. 

나처럼 아이를 양육을 하겠다는 미혼모를 받아주는 미혼모 시설은 단 한 군데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곳뿐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간신히 그곳을 알게 된 나는 생명을 중요시하고 낙태를 죄로 여기는 수녀들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돌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키웠다.      


당시 미혼엄마가 받는 처우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한 예로 당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미혼모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취재를 온 ‘그곳이 알고 싶다’ 팀이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를 하지 않겠다는 나에게 그러면 시청자들이 감히 미혼모를 얼굴도 가리지 않고 목소리도 변조하지 않고 방송에 내보냈다고 항의를 한다고 했다.  

공영방송에 미혼모가 당당하게 출연하면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우겠냐고. 

거짓말 같게도 불과 30년 전만 해도 미혼엄마들을 향한 시선은 그랬다. 

(지금은 좀 더 달라졌으려나? 그때에 비하면 엄청 달라졌다. 자발적인 비혼모가 예능에도 나오는 시대이니)

 

청춘의 덫에 나오는 심은하정도의 외모가 되어야 그나마 봐줄 만하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다. 

어떻게 미싱공 주제에 미혼모가 될 생각을 했냐? 는 말은 애교처럼 들리기도 했다.  

이 같은 편견에 맞서 나는 보란 듯이 더 잘 살고 싶었고 그래야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이 연대였다. 


나는 악착같이 일을 해서 겨우 전세방이지만 방 두 칸이 달린 집을 마련하고 아이를 키우고 싶지만 오갈 데가 없는 나 같은 미혼엄마, 특히 어린 미혼엄마들을 위해 공동육아를 시작했다. 

물론 선한 마음이었다. 함께 살면서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나의 아이가 살아야 하는 시대, 미혼모의 아이가 차별받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당당하게 잘 살아야 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연대하는 것이었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그렇게 시작한 일이었는데, 두 명의 미혼엄마가 네 명이, 여섯 명이 열명이 되었고, 이것이 입소문이 나면서 신문에도 실리고 방송에도 나가면서 나와 공동체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90년대 당시 미혼모들의 공동 육아 공동체였으니)


신기하게 몇 년 전만 해도 모자이크와 음성변조 없이는 티브이에도 출연하면 안 되는 사회악 같은 대접을 받았는데 여기저기에서 관심을 갖고 도와주겠다는 후원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후원금도 들어왔다. 

이제  집도 좀 더 집도 큰 집으로 옮길 수 있게 되자, 법인을 만들어야 했고 복지 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조언들을 수없이 들었다. 

그저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 싶었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적지 않은 후원금이 들어오자 자격증을 따고, 검정고시를 치고 자립을 준비해야 할 어린 미혼모들이 학원이나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했다. 

공부를 하거나 기술을 배우고 자립에 보탬이 되라고 보내온 후원금으로 어린 미혼엄마들은 아이를 방치한 채 술을 마시고 외박을 하기 시작했고, 남자까지 집으로 데리고 왔다. 

야단을 치는 나를 미혼모인 자신들을 팔아서 돈을 챙기는 악덕업주라며 모함을 했고, 내가 없을 때 나의 아이를 때리면서 나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결국에는 후원회장을 자처하는 이가 공동체의 운영을 모두 자신이 할 테니 나는 모든 운영에서 손을 떼라며 협박을 했고, 결국 나는 아이와 함께 모든 것을 미혼모들에게 주고 가방 하나 들고 그곳을 나와 일 년 동안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었다.  


내 생애 가장 큰 상처였다. 상처는 분노와 미움을 낳았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을 때도, 사랑에 실패를 했을 때도, 혼자 아이를 낳아야만 했을 때도 아프기는 했지만 미워하고 분한 마음은 없었는데. 그녀들이 준 상처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그 상처의 후유증은 오래오래갔다.

  

상처라는 것이 그런 거다. 

건강하게 회복되지 않으면 상처야 말로 무서운 무기이다. 

아파본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건강하게 잘 회복이 되어 지난 상처에 발목이 잡혀있지 않는 사람에 한해서다.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 수도 있지만 과부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는 이도 같은 상처를 가진 홀아비일 수도 있는 거다.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처가 칼이 되어 상해를 줄 수 있으니, 아픔과 상처가 약재료가 될 수도 악의 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후자였다. 미혼모는 돕고 싶지도, 긍휼 한 마음을 갖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도 하기 싫었다. 

초등학교 막 입학을 한 아이와 고시원에서의 지냈던 일 년의 기억은 두고두고 나의 마음을 욱신거리게 했으니.

그 누구와도 연대 따위는 하지 않으리라. 철저하게 나 혼자 잘 살아야지. 다짐에 다짐을 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하지만 그곳에서 20년을 지나오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했다. 

신앙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은혜와 사랑을 길목 길목에서 만났다. 

사랑을 만났더니 상처들은 치유되고 회복되었고 쓴뿌리들은 뽑혔다. 

그 가운데 그때의 상처도 있다. 물론.      


어느 순간, 그때를 생각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울분이 터트려지지도 않았다. 

사랑을 만난 상처는 굳은살이 박혀서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았다.      

이제는 미혼엄마를 생각해도 괜찮았다. 

하긴 한국에서는 나 말고 미혼엄마를 만난 적이 없으니 굳이 생각을 안 해도 자연스럽게 잊혀갔다. 


그런데 탄자니아에 오니 미혼엄마들이 너무 많았다. 

한국에서는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개연성 없는 막장 같은 인생들이 이곳에서는 곳곳에 널려 있었다.  

갈 곳 없는 어린 미혼엄마들이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그녀들을 볼 때마다 욱신욱신거렸다. 

사랑을 만난 상처는 긍휼함이 되었고 아픔이 되었다.       

이곳에서 비로소 측은한 마음으로  그때의 어린 엄마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열여덟, 열아홉의 어린 엄마들.  

기지촌에 있다가, 혹은 가출팸에 있다가 임신을 했지만 엄마가 되고 싶어 했던 젖살도 빠지지 않았던 아이들. 

이제 중년이 되었을 그 아이들은 어떤 엄마가 되었을까?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그때의 엄마들보다 더 어른이 되었겠구나. 

어떻게 살았을까?

그 벼랑 끝에서.      


벼랑 끝 같은 고시원에서 나와 아이를 구해주었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이들의 사랑이었다.   

탄자니아 벼랑 끝. 

그때의 나와 어린 엄마들을 닮아 있는 탄자니아 미혼 엄마들을 위해 땅끝에서 내가 이곳에 온 것일까?     


결국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향유옥합을 깨트리기로 마음먹고 그때처럼 연대를 소망하기로 했다.       


나의 마음과 소망을 글로 써서 몇몇의 엄마들과 엄마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들에게 보냈고 그녀들 역시 자신들의 향유옥합을 깨트려 나와, 그리고 이곳의 미혼엄마들과 함께 연대해 주었다. 

비록 그때의 연대가 아픔과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결국 그 아픔과 상처의 연대가 또 다른 연대의 소망의 되어준 것이다. 


결국, 우리는 연대하며 함께 지어져 가야 되는 존재이니까. 

브런치 글 이미지 5



이전 12화 꿈꾸지 않으면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