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를 기다리는 나무

by 쪼교


어딘가 이름조차 불리지 못한 산이 있었다. 지도에도 제대로 표시되지 않는, 그저 바닷가에 몸을 기대어 서 있는 산. 사람들은 그 산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눈길을 주기도 했지만, 그것은 풍경의 일부로 스쳐 지나가는 시선일 뿐이었다. 그러나 무심한 눈길 속에서도 산은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산의 중턱에는 오래 전 작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는 비어 있었으나, 결코 공허하지 않았다. 다람쥐가 와서 씨앗을 묻고, 노루가 와서 잠시 눕고, 여우가 지나가며 발자국을 남겼다. 작은 새들은 날아들어 노래를 뿌리고, 이윽고 날아갔다. 비어 있음 속에도 생명은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잊는다. 비어 있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간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다.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해 무언가로 채우려 하지만, 때로는 그 비어 있음이야말로 새로운 가능성의 땅이 된다.


그들이 남긴 씨앗은 잊힌 듯 땅속에 묻혀 있었지만, 어느 날 발아했다. 작은 나무들이 고개를 들었고, 서로 기대어 숲을 이루었다. 그 숲은 바다와 마주 서서 붉은 노을을 온몸으로 받아내곤 했다. 바닷바람이 불 때면 나무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며 울음을 흘렸고, 그것은 숲의 언어였다. 그러나 숲 안에서는 또 다른 법칙이 작동했다. 큰 나무들이 햇빛과 땅의 영양분을 차지했고, 작은 나무들은 그림자 속에서 점점 마르고 시들어갔다. 큰 나무들은 작은 나무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눈에는 큰 나무들만 보였을 뿐이다.


이 장면은 사회와 닮았다. 우리는 악의를 품지 않고도 수많은 이들을 소멸시키며 살아간다. 거대한 권력이나 체계가 아니더라도, 단지 무심함 하나로 우리는 누군가를 그림자 속으로 내몰 수 있다. 큰 나무의 무관심은 인간 사회의 무관심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 무관심은 때로 가장 무서운 폭력이 된다. 사람은 다른 이를 죽이지 않고도 죽일 수 있다. 무심히 지나치고, 끝내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작은 나무의 유일한 슬픔은 단 하나였다. 바다를 볼 수 없다는 것. 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상상했으나,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그것은 결핍의 고통이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늘 어떤 ‘바다’를 꿈꾼다. 그러나 그 바다는 대개 손에 닿지 않는다. 더 나은 삶, 닿을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는 희망. 그것은 늘 우리 곁에서 파도소리처럼 들리지만, 끝내 발아래로 펼쳐지지 않는다. 작은 나무가 흘린 눈물은 곧 인간이 살아가며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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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끼와 톱을 들고 숲을 무참히 베어냈다. 거대한 나무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나무들이 수십 년 동안 견뎌낸 바람과 눈보라는 이들 앞에서 아무 의미가 되지 못했다. 문명이란 대개 그러하다. 우리는 자연을, 사람을, 역사를 하루아침에 무너뜨린다. 몇십 년의 삶이 단 하루 만에 사라지는 경험은, 전쟁과 재난, 혹은 개인의 갑작스러운 상실을 겪은 이들에게 낯설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작은 나무만은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보기에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가치하다고 여겨진 존재가 오히려 남는다는 아이러니. 사회에서 낙오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때로는 긴 시간 끝에 끝내 살아남아 있는 이유도 같다. 하지만 살아남음은 축복만은 아니다. 작은 나무가 홀로 바다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더 이상 꿈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혼자라는 사실은 풍경을 축복이 아니라 공포로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버텼다. 태풍과 폭설, 가뭄과 혹한 속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살아남겠다는 결심은 그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세월이 흘러 그는 어른 나무가 되었고, 마침내 열매를 맺었다. 버티는 자에게만 도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버틴다는 것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다. 버틴 끝에 얻는 것은 성숙과 고독, 풍요와 상실이 함께 엮여 있다. 버팀의 미학은 동시에 버팀의 저주이기도 하다.


다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무를 베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미 베어낸 나무들을 깎아 기둥과 지붕을 세워 정자를 지었다. 그 정자는 과거 숲의 동료였던 큰 나무들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전환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던 때와는 전혀 다른 쓰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작은 나무는 정자를 향해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나를 기억하니? 우리가 함께 숲이었던 시절을.”

그러나 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나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 장면은 인간 관계와 닮아 있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던 이들이 떠나고, 남은 자가 홀로 기억을 이어간다. 그러나 기억이란 고통이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가 짊어져야 하는 가장 무거운 몫이다. 살아남음의 대가는 결국 외로움이다.


마지막에 작은 나무는 뿌리를 뽑아 바다로 몸을 던졌다. 그것은 패배였을까, 아니면 해방이었을까. 바다를 바라보며 평생 갈망만 하던 존재가 마침내 바다와 하나가 된 것이다. 어쩌면 죽음은 더 이상 갈망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영원히 갈망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나는 작은 나무의 선택을 오래 생각한다. 그는 버텼고, 살아남았고, 끝내 스스로를 놓아버렸다. 존재의 이유는 끝내 살아남는 데만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세계와 하나 되는 순간에 있는 것일까. 삶은 버팀과 놓음 사이에서 진동한다. 우리는 버텨야 살아남고, 놓아야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언제 버티고 언제 놓을지는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것은 각자의 운명, 각자의 결단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 깨닫는다. 숲을 지탱하는 것은 늘 눈에 띄는 큰 나무들이 아니라, 그림자 속에서 조용히 버티는 작은 나무들이었다는 사실을. 역사를 지탱하는 것도, 사회를 지탱하는 것도, 삶을 지탱하는 것도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늘 그림자 속에 있으면서도, 끝내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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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모두는 그 작은 나무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바다를 향한 갈망 속에서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 그리고 언젠가, 각자의 바다로 스스로를 던질 날을 기다리는 존재. 그 순간이 패배일지, 해방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바다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저 멀리 빛나는 수평선을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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