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혹시, 책으로 도망쳐봤어요?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 내가 설명해 줄 테니 들어봐요.
제가 누구와 대화한다고 생각해 봐요. 근데 그 사람하고 대화가 안돼,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해요. 답답하죠. 거기에 그 사람하고 싸우기까지 했어요. 그 공간에 그 사람과 저 그리고 책만 있었어요. 그럼 어떻게 하시겠어요?
책으로 도망치지 않겠어요?
저에게 책은 부모고, 선생이고, 친구고, 남편이에요. 넓은 공간은 필요 없어요. 책만 있는 공간이면 돼요. 그 공간에서 제가 숨만 쉴 수 있으면 돼요
선생님, 제가 병원에 있으면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근데 가족들과의 일은 생각나지 않아요. 남편이고 딸이고 뿌연 연기 속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아요. 저만 빼고 다들 뭐 하고 있을까요? 즐겁게 대화하고 있을까요? 아마 열심히 웃고 있을지도 몰라요.
딸이 대학 입학했을 때, 제가 입학 선물로 책을 선물해 줬어요. 정치외교 학과니까. 제가 정치에 관련된 책을 다섯 권 줬어요. 나중에 딸이 그러더라고요. 유학을 결심한 계기가 엄마가 선물해 준 그때 그 책 때문이었다고요. 숨 막혔데요. 엄마도 책도 숨 막혀서 집에서 도망치고 싶었데요. 그래서 떠났데요. 딸은 그곳에서 자리 잡아서 이제 안 돌아올 거 같아요.
늙으면 자식은 떠나가도 남편은 옆에 남는다고 하잖아요? 전 남편과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해요. 멋진 카페에 가서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좋아하는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거요. 하지만 남편은 항상 피곤해했어요. 카페에 가도 한 번에 홀짝 마시고 자리를 뜰 생각만 했죠. 항상 혼자 남았어요. 그러면 책을 읽었어요. 그거 아세요? 책을 중간만 읽다가 덮으면 책이 부르는 거요. 빨리, 빨리 와서 이야기를 진행시켜 달라고 등장인물들이 불러요. 전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 나머지 이야기를 진행시켜 주고 마무리를 지어줘요. 얼마나 뿌듯한지 아세요.
언젠가 남편과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밖에 나가 산책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전 피곤해서 쉬겠다고 했어요. 나 혼자 책을 읽고 싶다고 했어요. 옆에 있어달라고 했어요. 남편이 화를 내더라고요.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전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모든 것을 묵묵히 수습하는 침묵으로 기다렸어요. 이해해 주기를...
그날 이후 남편이 부담스러워졌어요. 책을 읽으면 책과 원수를 졌느냐며, 삼류 작가가 쓴 책이라면 비웃기까지 했어요. 제가 침묵을 깨면 싸움이 시작됐어요. 그럼 눈치가 보여 책을 못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책이 절 불러요. 잠 자려 들면 책의 등장인물들이 자꾸 저를 깨우기 시작해요 남편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이야기를 듣고 잠들곤 했어요. 그렇게 몰래 책을 읽게 된 거 같아요. 제가 잘못한 것 마냥 말이죠.
남편을 독서모임에 데려간 적이 있어요. 남편은 2시간 동안 침묵 속에 절 기다렸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제가 남편에게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요. 제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남편은 여행을 즐겼을 텐데. 내가 밤늦게까지 책을 읽지 않았다면 남편은 편히 잠들었을 텐데. 남편이 예민한 것이 아니라 내가 잘못했다는 걸요. 그 이후로 남편과 거리를 두기로 했어요. 같이 무엇을 하기보다는 나 혼자서 하기로요. 그래야 남편도 자유로워질 거라 생각했어요.
저는 책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남편이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이혼하자고.
제가 매일 혼자 방에만 틀어박혀있다고. 책만 보고 있다고
전 물었어요. 우리 사이가 안 좋았냐고요
남편이 웃더군요.
그럼 우리 사이가 좋은 적이 있었냐고.
전 남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 좋았어요.
남편과 책이 같은 공간에 있길 바랐어요.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했어요. 남편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전 책만 보고 싶었어요
그날 이후 전 아팠어요. 몸과 마음이 아파 서 며 칠을 누워있었어요.
그 시간이 그리워질 거 같아요
그럼 또 책으로 돌아가겠죠. 그렇게 반복되겠죠.
어느 날 딸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 엄마 책 좀 그만 읽어, 책은 책일 뿐이야. 책이 엄마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
“ 책 읽을 시간에 아빠하고 다시 잘해봐 봐”
외국에 살아서인지 딸은 메마른 말투를 써요.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말을 해서 그런가 봐요. 전 딸에게 말해요. 책 좀 읽으라고 감정이 없는 사람 같다고, 그럼 딸은 질렸다는 듯 별말 안 하고 전화를 끊어요.
딸은 무책임하게 저를 버리고 떠났어요. 이젠 남편도 저를 떠나려 해요
이 모든 건책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책을 멀리하려 했죠. 집안에 있는 책은 모두 정리하려고 상자에 넣어놨어요. 하루에 두 갑씩 피우던 담배도 끊었어요. 운동도 하고 영화도 보고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도 책 없이 차만 마시고 왔어요. 매일 밤 책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어요. 제 공간은 평온해질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공허했어요. 늘 적막한 시골길을 혼자 걸어가는 기분이었어요..
선생님 그거 아세요? 결국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느낌.
결국 남편과는 이혼하게 되었어요.
다시 혼자가 되었어요. 제 공간엔 아무도 남지 않았어요. 책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어요.
전 책을 배신했지만, 책은 저를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책을 믿는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야
어려웠을 텐데 넌 우리를 포기하지 않았어
어쩌면 그냥 놓아버렸으면 더 좋았을 수도 있지
그래도 우리에겐 좋은 순간도 있었지
또 그런 시간들이 있을 거야.
그냥 덮어버려도 넌 우리를 기다릴 거잖아
우리를 그리워할 거잖아.
책을 믿는다는 거...
너무 힘들지만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은 그냥 넘어가지만 돌아올 거잖아.
책을 믿는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가 너희를 숭배하고 찬양해 왔지만
너희는 우리에게 꿈을 주었고, 좌절도 맛보게 하였지
우리가 너희를 숭배하지 않아도
기다릴 거잖아.
손을 뻗어 우리를 어루만질 거잖아
책을 믿는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야
우리가 너희를 덮어버려도
너희는 한 단계 한 단계 나아갈 거잖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기다릴 거잖아
우리가 믿지 않아도
기다릴 거잖아....
ᅠ
ᅠ
ᅠ
어느 날 딸이 갑자기 귀국했어요. 딸이 하는 말은 모두 외국어 같았어요. 한국말을 하는 거 같은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딸이 이끄는 데로 왔는데, 지금 선생님 앞에 앉아있네요.
선생님 제가 뭐 잘못했나요?
어디가 아픈 건가요?
전 다만 책으로 도망친 것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