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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May 22. 2022

선비와 폭군 (1)

그의 첫사랑

  "자네 이번에도 승진 물 먹었어."

  "예?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실적이 가장 좋은 건 누구나 인정하지. 그런데 누가 자네 처가 쪽 사람이 빨갱이라고 얘기한 모양이야. 그래서 이번에도 승진하기는 어려울 것 같어."

  "아, 네..."


  역시 이번에도 그는 승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6.25 전쟁 당시 그의 처가 친척 중 한 사람이 산으로 숨어들었다고 해서 빨치산이니, 빨갱이니 하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20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놈의 소문은 어찌나 견고한지 빨갱이 소리에 모두 쥐 죽은 듯이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수석으로 회사에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연구원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수재 소리를 듣던 그에게 이것은 마치 감옥과 같은 형벌이었다.


  유년시절부터 그는 예절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는 3대 독자로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의 태몽에 호랑이 한 마리가 집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품 속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아들을 귀하게 여겼던 그의 집안 어른들은 꿈 이야기를 듣자, 나랏일에 이바지할 비범한 위인이 나왔다, 후손이 번창할 것이다 하면서 그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그의 할아버지인 유 진사 또한 그에 대한 기대가 컸는지 그가 3살이 되는 해부터 한자를 가르쳤다. 그는 10살 남짓에 대학을 깨우쳤고, 10대 중반에는 엘리트층인 아버지의 지도로 각종 서양의 번역서들을 읽으면서 큰 꿈을 키워나갔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집안의 헌신적인 도움 덕분이었는지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8살이 되는 해까지 학교에서 1등을 놓쳐 본 적이 없었다. 외국어면 외국어, 역사면 역사, 의학이면 의학. 어떤 학문이든 그가 섭렵하지 않은 학문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어째서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일개 평사원에만 머물러야만 했을까. 그것은 아마 순자와의 인연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순자와의 인연은 천생연분이었을까 아니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름길이었을까. 윗동네 성부자 댁의 첫째 딸 순자가 제 아버지를 대신해 근처 절에 시주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시험공부를 하며 책을 낭독하고 있던 그와 마주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랏일을 할 인재를 뽑는다기에 절 암자에서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그는 밤새 공부를 하다 아침이 되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절 입구의 약수터에서 시험서를 암송하고 있었다. 그때, 가마 하나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절 입구에 당도한 가마꾼들이 가마를 바닥에 놓자, 화사한 연분홍색 한복 치마를 차려입은 처자가 가마 안에서 나왔다. 하얀 얼굴과 붉은 연지를 찍어 바른 입술, 맑고 큰 눈, 오뚝한 콧날... 그 모습이 그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아 버렸다. 그녀는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대웅전으로 향해 계단을 걸어 올라갔고, 가마꾼들은 쌀 한 가마니씩 등에 짊어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는 호기심에 처자 일행의 뒤를 조용히 밟았다. 그리곤 대웅전 뒤편 기둥에서 몰래 그녀의 행동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대웅전의 주지스님에게 합장했는데, 그 백옥 같은 얼굴에서 어떻게 그런 생기 있고 어여쁜 미소가 나올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한편, 가마꾼들은 다른 스님의 인도를 받아 쌀 가마니를 절의 창고를 운반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주지스님의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스님과 다과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주지 스님의 방에 있던 그녀는 한 30분이 지나 방에서 나와 주지 스님에게 다시 합장하며 인사하고, 몸종과 함께 그가 서 있는 대웅전 뒤편 약수터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심장이 두근두근거려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가 닿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여자를 좋아하는 어엿한 남자임을 그녀에게 문득 알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유리왕의 '황조가'를 읊기 시작했다.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다운데."


  반 정도 시를 크게 암송하고 있을 때,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일부러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남은 시의 반을 마저 읊었다.


  "외로운 이 내 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그리고선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와 눈길이 마주쳤다. 그는 그녀의 크고 동그란 눈이 자신을 향해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깔끔한 양복 와이셔츠를 입은 채로 나무 그늘에 서 있었는데, 키가 훤칠한 그는 곁에 서 있는 나무와 제법 어울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선 그녀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녀도 그가 썩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옛말에 이르길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쉽게 아는 척을 할 수가 없었고, 다만 아쉬운 눈인사만 하며 설렜던 첫 만남을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그렇게 서로 만날 기회가 없을 것만 같았던 그들은 한 달 뒤 그녀가 절에 시주를 하러 오면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녀가 대웅전에 들자마자 머슴 편에 연서를 전해주며, "처자가 대웅전에서 나와 전처럼 약수터로 향하거든, 이 편지를 전해 주거라. 그러면 답신이 있을 터이니, 답신을 들고 내게 오너라."하고 반드시 편지를 전해야 한다 신신당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슴이 답신을 가지고 그에게 오자, 그는 급히 봉투를 뜯어 답신을 읽었다.


  "내일 정오에 뒷동산 그네터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사실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암자에서 집으로 내려와 다음날 입을 양복을 미리 챙겨놓고 일찍 잠을 청했다. 다음날이 되자,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나 집안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방에서 공부하는 행세를 하면서 어서 정오가 되기를 기다렸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머슴을 데리고 뒷동산으로 출발했다.

  도착한 시각은 정오가 조금 못 되는 시각이었다. 아직 그녀는 그네터로 오지 않은 듯 보였다. 30분 정도 기다리고 있을 때, 해가 뒷동산을 비추면서 가마꾼들이 가마를 들고 동산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네터에 다다라 가마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가마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그가 서 있는 쪽으로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지만,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려는 모습은 그를 꽤나 의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머리 위로 장옷을 걸치고 몸종의 인도를 받아 그네 위에 올랐다.

  장옷을 몸종에게 넘기고선 마침내 그네를 뛰는데, 그 모습이 마치 천상의 선녀님과 같았다. 펄럭이는 연녹색 치마와 연분홍색 저고리가 뒤엉켜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그네를 조금씩 뛰어가며 그에게 눈길을 보냈다. 그리고는 조금씩 미소를 지었는데, 그 눈길과 미소가 그를 한없이 매혹시켰다. 그는 그녀의 그네 뛰는 모습을 바라볼 때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고, 그녀가 입을 열어 황진이의 시를 읊을 때에는 이미 다른 세상으로 가 있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 춘풍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그가 전에 그녀를 보았을 때엔 아름다운 한 폭의 꽃 그림이었다면, 이제는 그녀가 벌과 나비를 유혹하는, 향기 나는 꽃이 되어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더구나 이 시조를 읊었다는 것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는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그네를 뛰고 있는 처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도 그네 뛰는 것을 멈추고 몸종의 부축을 받아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아랫마을 사는 유태경이라 합니다."

  "저는 윗마을 사는 성순자라 합니다."


  그렇게 통성명을 한 두 사람은 쑥스러움에 서로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사내 체면에 쭈뼛거리기만 할 수는 없다 생각했다. 이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처자는 어느 댁 규수입니까?"

  "아랫마을 성 부자댁 첫째 딸입니다."


  그는 이 근방 지역에서 부자라고 소문난 성 부자를 잘 알고 있었다. 장돌뱅이 시절부터 지금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서 살기까지 무엇 하나 스스로 이루지 않은 게 없다고 아랫마을까지 소문이 쫙 퍼졌더랬다. 또 소문뿐만 아니라, 상업이 앞으로 대한의 미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있어 자수성가의 표본인 성 부자는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성 부자의 어여쁜 딸을 만나게 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순자에게 무엇이든 더 잘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전날 밤을 새워가며 그린 그림 하나를 순자에게 선물로 건넸다.


  "어머, 이것이 무엇인가요?"

  "별 것 아닙니다. 전날 그대를 본 특별한 기억을 화폭에 남기고 싶었을 뿐입니다."


  순자가 포장을 걷어내자, 그가 절에서 보았던 순자의 모습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크고 맑은 눈, 버선코같이 선이 예쁜 콧날, 앵두빛 입술, 살짝 분칠 한 얼굴까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순자는 그림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어여쁩니다. 제가 정말 이렇게 어여쁘단 말입니까?"

  "그림은 그림일 뿐, 실제 인물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의 아부 섞인 말을 듣자, 그녀는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오손도손 대화를 나누면서 해가 저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긴 시간을 그네터에서 함께 보내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자리를 파했다.

  그 뒤로 그들은 종종 뒷동산 그네터에서 만나면서 친분을 쌓아 나갔다. 때로는 그가 공부하고 있던 암자 근처 약수터에서 남들의 이목을 피해 만나기도 했다. 그렇게 조금씩 쌓여가는 정은 불꽃처럼 한순간에 커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고, 그녀를 품에 안고 싶어졌다. 그런 마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와 초야를 보낼 수만 있다면'하고 생각했던 그는 그 마음을 실행에 옮기기에 이르렀다.


  그녀와 만난 지 한 달 즈음되었을 무렵, 그는 서신을 통해 그녀에게 아랫마을 물레방앗간에서 보자고 운을 띄웠다. 그렇게 그녀에게 서신을 보내 놓고 그녀가 거절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을 때, 머슴 편으로 그녀의 답신이 도착했다. 그녀의 답은 승낙이었다. 두 사람은 자정이 넘은 시각, 조용히 물레방앗간으로 숨어 들어갔다. 물레방아만이 물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고,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두 사람은 밝은 곳에서 만난 것보다 이 어두침침한 곳에서 만난 순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들은 서로 껴안았고, 그의 입술과 그녀의 입술이 맞닿았다. 이윽고 혀와 혀가 섞이면서 두 사람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댕기머리를 한 그녀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한 손으로는 그녀의 옷고름을 풀어내려 애썼다. 그녀의 옷고름을 잡아당기자, 그녀의 하얀 속살과 함께 동그란 가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그녀의 젖가슴을 만지자, 그녀가 탄식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욕정을 참지 못하고 그가 그녀의 치마를 벗겨내었고 미리 천을 깔아 둔 바닥에 그녀를 눕혔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계속 입을 맞추면서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양복 와이셔츠를 훌렁 벗어재꼈다. 그의 와이셔츠 안에 숨겨져 있던 근육이 그녀의 눈앞에 드러났다. 둘은 이제 서로의 몸을 탐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녀의 젖가슴을 애무하고, 그녀는 그의 성기를 애무했다. 어느 정도 달아올랐을 때, 그는 마침내 그녀의 안에 뜨거워진 자신의 성기를 넣었다. 둘은 이제 용광로에 빠진 것처럼 땀을 흘리면서 서로의 육체를 마음껏 느꼈다. 그 육체의 탐닉은 절정에 이르러 그들은 깊은 신음소리를 끝으로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는 땀으로 젖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녀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도련님,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실 거지요?"

  "당연하오. 그대는 내 영원한 정인이오."


  젊고 어린 18살, 16살의 두 남녀는 그렇게 초야를 보냈다. 그러나 그들의 초야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뒤로 무슨 용기가 생긴 건지 두 사람은 며칠에 한 번씩 물레방앗간에서 만나 관계를 가지곤 했다.


  사랑을 나눈 대가였을까. 아니면 사랑의 징표였을까. 3개월 정도 지나자, 그녀의 배가 점점 불러왔고, 그녀는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임신을 하다니, 예나 지금이나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성 부자는 배를 맞춘 놈이 누구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바들바들 떨면서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성 부자는 답답하여 애가 탈 노릇이었다. 그때 성 부자댁의 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연인인 그가 나타났다. 그는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고 마당으로 들어와서는 바닥에 꿇어앉았다.


  "어르신, 순자를 제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성 부자도 멀끔하고 잘생긴 청년이 값비싼 양복을 입은 채로 들어와 순자를 아내로 내달라 하니, 대로했던 감정이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자네는 어느 댁 자제인가?"

  "저는 아랫마을 유가 충렬 되시는 분의 자식입니다."


  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성 부자는 아랫마을 유가네가 유서 깊은 집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터라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자신의 딸을 무단으로 임신시킨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순자와 몰래 만나 그 아이를 임신시켰나? 진작에 교제를 허락받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지 않나."

  "어르신, 그것은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천 번, 만 번 죄를 물으셔도 소인은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와 아이는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절대로 순자와 아이를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성 부자는 진심을 다하면서도 유창한 그의 말솜씨에 믿음이 갔다. 그에게 식사를 차려주고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가 돌아가는 편에 유가네에서 납채(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청혼서와 신랑의 사주를 보내는 일)서를 보내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을 서찰로 전달했다.


  "집안 어른들께 지금 상황을 잘 설명드리고, 혼인 허락을 받아 납채서를 보내오도록 하게. 그러면 내 자네를 용서하겠네."

  "예, 어르신."


  그는 성 부자에게 순자와의 결혼 승낙을 받은 것에 들떠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와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리고 성 부잣집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할아버지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호통을 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여태 똑똑한 줄 알았더니, 아주 반푼이가 따로 없구나. 뉘 집 자식인 줄 알고 그 아이를 품었더냐."

  "저는 순자 그 아이를 연모합니다. 더구나 그 아이가 성부자 댁인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덕망 있는 우리 집과 재물 많은 성부자 댁이 어울리지 않을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이제는 상업이 중심인 세상이 올 것입니다. 상업을 경시하던 옛날과는 다릅니다, 할아버님."

  "그래도 그런 상스런 집안과 유서 깊은 우리 문화 유 씨 집안이 어울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할 것 같으냐. 됐다, 너는 모르는 척하거라. 이 할애비가 다 알아서 할 것이니."

  

  그날부터 그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방 앞에는 머슴들이 지키고 있었고, 때때로 여종들이 밥상을 들고 그의 방을 드나들 뿐이었다. 며칠이 지났을까. 그는 방문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시시각각 머슴들의 행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밤이 되자, 지키고 서 있던 머슴들이 하나둘씩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는 기회라 생각하고 까치발을 들고 조심조심 방문을 나서 담을 넘었다. 키가 훤칠한 그가 담을 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들고 있던 구두를 신고 성부자 댁으로 냅다 달렸다.


  한편, 성부자 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유가네 손자 편에 서찰을 보냈던 성부자는 하루가 지나 유가네 하인이 답신을 보내왔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서 버선발로 사랑방을 뛰쳐나왔더랬다. 그러나 답신을 받아보고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뻗쳐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성부자의 아내인 이 씨는 남편이 읽다 만 답신을 읽었다.


  "네 이놈, 아직도 천지 구분을 못하고 반상의 법도를 거스르려 하느냐. 갑오년에 너희들이 신분을 벗어나고 서구에서 신문물이 들어왔다 해도 엄연히 선비의 가풍과 족보가 남아 있느니라. 어디 장돌뱅이 장사치 주제에 우리 문화 유 씨의 3대 독자를 넘보려 하느냐. 내 머리에서 피가 솟구쳐도 안 될 일은 안 될 일. 썩 물러가거라."


  성부자의 아내도 글을 읽자마자, 속이 상해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더랬다. 그 이후, 성부자 내외는 유 진사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칼을 갈게 되었다. 그러나 처녀가 임신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윗동네 아랫마을 모두 퍼져버려 성부자의 위신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야밤에 그가 찾아온 것이었다. 양복을 빼입었다고는 해도 산을 넘어와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거지꼴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머슴들의 안내를 받아 성부자 댁 마당에 도착하자마자 엎드려 큰 소리로 성부자를 불렀다.


  "어르신. 어르신!"

  

  밤중에 잠에서 깬 성부자 내외는 대청마루로 나와 그를 대면했다.


  "네 이놈! 예가 어디라고 오는 게냐? 네 놈을 당장 멍석말이로 패 죽여도 시원찮느니라. 그런데 감히 여길 찾아와?"

  "저희 조부께서 어찌하셨을지 저도 짐작이 갑니다. 어르신께서 겪으신 수모를 제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순자에 대한 제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부디 순자와 제가 혼인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정히 그렇다면 네 할애비에게 가서 순자와의 혼인을 허락받아 오너라. 그 전까진 이 집에 발도 못 붙일 줄 알거라."

  "예, 어르신."


  그는 남루한 꼴을 한 채 다시 산을 넘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이미 그가 없어진 것을 알고선 발칵 뒤집혔다. 그의 할아버지 유 진사는 하인들을 시켜 그를 찾았고, 하인들은 그를 찾다가 그가 산길을 통해 걸어오는 것을 보고선 그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하인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채로 할아버지에게 끌려와 무릎을 꿇고 빌었다.


  "할아버님, 부디 순자와의 혼인을 허락해 주십시오. 제 일생에 처음이요, 한 번뿐인 연정입니다. 그 아이와 혼인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혀를 끊어 자결할 것입니다."

  "네 놈이 참으로 못났구나. 우리 집안의 3대 독자로서 집안의 명성을 드높일 생각은 않고 계집에게 빠져 이게 무슨 짓이냐. 어릴 적부터 대학을 깨우치고 서양의 서적을 독파하면 뭣하느냐. 작은 것에 현혹되어 큰 것을 보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굴고 있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에게 빠져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순자는 나이가 어리나, 어려서부터 여러 서적들을 읽어 현명하고 사리에 밝습니다. 능히 사대부가의 안사람으로서 집안의 살림을 맡을 만한 인재입니다. 또, 그의 아버지 성부자 어르신은 이 일대 지역에서 가장 평판이 좋기로 유명한 분입니다. 성부자 어르신은 재물을 모으는 것에도 정도가 있고, 원칙이 있는 분입니다. 순자를 통해 절에 시주도 가장 많이 하는 분도 성부자 어르신입니다. 아비가 그리 덕이 많은데, 순자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부디 순자와의 혼인을 허락해 주십시오. 아니면 이 자리에 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가 땅바닥에 머리를 찧으려 하자, 할아버지 유 진사는 하인들을 시켜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저 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저 놈을 곳간에 가두고 물 한 모금 내주지 마라."


  하인들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그의 양팔을 붙잡고 곳간으로 끌고 가서 그를 곳간 안에 던져놓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햇빛을 볼 수 없으니,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곳간 안에 갇힌 그는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한 채로 점점 야위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순자와의 연정을 떠올렸다. 곱디 고운 얼굴을 하고선 다소곳하게 스님께 쌀을 시주했던 그녀, 동산 그네터에서 그네를 타며 그에게 황진이의 시조를 읊어 주었던 그녀, 물레방앗간에서 초야를 보내며 영원을 약속했던 그녀. 그녀를 떠올리니,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녀를 보지 못하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가슴이 아려왔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꼭 쥐고 멀리 성부자 댁에 있을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때, 곳간 문이 열리면서 그의 아버지인 유 씨가 들어왔다. 원래 그의 아버지 유 씨는 집안의 가풍과 족보에 집착하는 할아버지 유 진사와 달리, 일찍이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아 젊은 시절에 불란서(프랑스)로 유학해 신문물을 배우고 돌아온 지식인이었다. 평등, 박애 사상에 눈을 뜬 그는 집안의 위신을 신경 쓰기보다 3대 독자 아들에 대한 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런 유 씨가 잠시 볼일이 있어 서울에 갔다가 돌아온 사이 아들 태경이 곳간에 갇혔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 급히 곳간 문을 연 것이었다.


  "태경아, 이제 좀 정신이 들었느냐?"


  유 씨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아들을 일으켜 앉히고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가까스로 정신이 든 그는 오로지 순자에 대한 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었다.


  "전... 순자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네 어미에게 그동안의 자초지종을 들었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느냐."


  유 씨는 아들의 등을 한 번 쓸어내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저는 단 한 번도 할아버님의 뜻을 거스르려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순자와 혼인하게 해 주신다면 달리 소원이 없을 것입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아버님. 도와주십시오."


  그는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먹지 못해 무력한 상태에서도 아버지 앞으로 기어가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빌었다.


  "걱정 말아라, 내 네 할아버지를 설득해 혼인할 수 있도록 할 테니. 그전에 방으로 들어가 밥 한 술 뜨거라. 네 어미의 걱정이 태산이구나."


  그는 머슴들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이 녀석아, 부모 속을 썩이니 그래 좋으냐?"

  "어머니,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순자와 아기를 도저히 져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네 아버님께서 할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한편, 아들 태경을 안심시키고 사랑채에 들어선 아버지 유 씨는 할아버지 유 진사와 독대하고 있었다.


  "네 어찌 그 아이를 곳간에서 풀어준 게냐? 아직 한참 더 정신을 차려야 할 녀석을 왜 풀어준 게야?"


  할아버지 유 진사는 불같이 역정을 냈다. 아버지 유 씨는 최대한 침착하게 아버지의 말에 대답했다.


  "이 집안의 3대 독자인 아이를 그리 혹사시켜서야 되겠습니까. 게다가 그 아이는 장부답게 제 연인과 아기를 지키겠다 하질 않습니까. 오히려 칭찬을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지금은 아버님께서 살아오시던 구한말이 아닙니다. 이제 새 정부가 수립된 시기입니다. 아이들이 젊은 나이에 마음이 맞아 연애도 할 수 있고, 저희들끼리 따로 가정을 꾸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저 아이가 처자를 데리고 도망이라도 가면 그때는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두 사람의 혼인을 허락하시면 태경이 녀석이 안사람의 내조로 더 반듯해질 테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허나 족보도 없는 상놈의 집안과 혼인시킬 수는 없다!"

  "아버님, 언제 적 말씀을 하십니까. 이제는 모두가 평등한 세상입니다. 신분 고하도 없고, 성씨 족보도 무의미합니다. 오히려 재물을 허튼 데 쓰지 않고 힘든 이들을 위해 쓰는, 덕망 높기로 소문난 집안이 아닙니까. 그런 집안과 연을 맺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래도 안 될 건 안 된다."

  "아버님께서 정히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희 식구는 분가하여 아버님과 연을 끊겠습니다. 정녕 그걸 원하십니까?"


  도저히 장돌뱅이 집안과는 사돈을 할 수 없다 버티던 할아버지 유 진사는 유 씨의 식구가 따로 나가서 산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뜻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집안에서는 납채서를 보내는 행사로 시끌벅적했다. 집사에게 납채서를 맡겨 상대 집안에 보내는, 간단하다면 간단한 일인데도 일하는 하인들이 그 광경을 보겠다고 모두 마당으로 나왔던 것이었다. 하인들은 순자라는 처자가 누구인지, 이 집으로 시집 올 작은 마님이 누구인지 벌써부터 궁금해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유 진사는 마당으로 나오지 않았고, 대신 아버지 유 씨가 행사를 진행했다. 그는 아버지 유 씨와 함께 서 있다가 유 씨가 집사에게 납채서 건네는 것을 보고서 방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고 집사와 마을 어귀까지 동행한 뒤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 중에는 뉘 집에서 납채서를 보낸다더라 소문이 난 모양인지 그들의 행렬을 쫓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혼인절차가 진행되어 초행(신랑 일행이 신부 집으로 가는 일)하는 날이 다가왔다. 그는 검은 양복을 말끔하게 빼어 입고서 역시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아버지 유 씨와 친지들을 따라 윗동네 성부자 댁으로 향했다. 할아버지 유 진사는 병을 핑계로 동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말을 타고 갔는데, 산 하나 넘기에는 튼튼한 말들이어서 행차하기 충분했다. 아침에 출발한 그들은 반나절이 지나 정오쯤 성부자 댁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큰 기와집에 친지들이 다들 놀라고 있을 때, 집안에서 하인 하나가 나와 그들을 반겼다. 그의 안내를 받아 집안으로 들어간 그들은 성부자가 있는 사랑채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성부자는 그때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하인이 "유 진사 댁에서 초행 오셨습니다." 하자, 버선발로 사랑채 앞까지 나와 유 씨 일행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초면에 깐깐하게 나올 줄 알았던 성부자와 유 씨는 서로의 가풍을 칭찬하며 덕담을 이어나갔다. 성부자는 아마 아버지 유 씨가 할아버지 유 진사와는 달리 개방적인 인물이라는 소식을 미리 접한 듯했다.


  "오는 길에 들으니, 이 고을에서 성부자 댁의 덕을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더군요. 오늘 와서 보니, 과연 그러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저야말로 아랫 고을에서 유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존경하지 않는 자가 없다 들었는데, 과연 엘리트십니다."


  한 마디씩 주고받자, 두 어른은 함께 호탕하게 웃었다. 그 사이 술상이 나왔고, 두 어른과 친지들은 마음껏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성부자 댁에 온 김에 그동안 고생했을 순자의 얼굴을 꼭 보고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소피(소변)를 보러 간다고 얘기하고, 조심스레 사랑채를 돌아 순자가 있는 별채로 향했다. 그가 별채 앞에 도착해 순자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안에서 순자가 몸종과 도란도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씨, 아씨께서 혼인하게 되어 참말 다행입니다. 저는 아씨께서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되면 그 신세가 얼마나 처량할지 걱정했었습니다. 다행히 유가 도련님께서 아씨를 끝끝내 버리지 않으셔서 혼인이 성사되니, 참말 다행입니다."

  "그분은 처음 뵈었을 때부터 뭔가 다른 분이었어. 나와 아이를 죽어도 책임지겠다고 하신 걸 보면 장부 중의 장부지 않니. 나도 앞으로 이 분께 내 명운을 걸 것이다. 나와 아이의 명운을."


  별채 밖에서 그녀의 말을 들은 그는 감격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순자가 이토록 나를 믿어주다니, 내가 순자를 선택한 것이 결코 그른 일이 아니었구나. 이쯤 생각하고, 그는 순자가 있는 방을 향해 최대한 점잖고 근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낭자!"


  몸종이 순자의 방에서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이윽고 순자가 배를 움켜잡고 뒤뚱거리며 뒤따라 나와 그를 맞이했다.


  "도련님!"


  순자를 보자마자 그는 와락 순자의 몸을 껴안았다. 순자의 몸에서 달큼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났다. 그는 몸을 껴안자마자 배에 느껴지는 태동을 느끼고 순자의 배를 살살 어루만졌다.


  "아이는 잘 크고 있소?"

  "예, 그럼요. 아주 건강하게 잘 크고 있습니다."

  "낭자, 그대가 고생이 많았구려. 이제 함께 행복할 날만 남았소."

  "예, 도련님. 도련님과 백년해로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으면서 마주 보며 웃었다. 이제 혼인하게 되면 평생 행복하게 살겠구나.


  그러나 그와 순자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들의 혼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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