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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Jun 03. 2022

선비와 폭군 (2)

전쟁의 서막

  때는 여름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즈음이었다. 순자는 어느덧 임신 3개월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입덧은 더욱 고약해졌는데, 특히 비린 생선이나 해산물은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을 해댔다. 그녀의 입덧이 잘 낫기만을 바랐던 양가 어른들은 그녀가 먹고 싶어 하는 음식들을 구해다 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루는 그녀가 곶감이 먹고 싶다 해 성부자가 직접 경상도에서 제일 유명한 상주 곶감을 사러 가기도 했고, 그녀가 쌀이 비려 먹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장차 시아버지가 될 유 씨가 성부자 댁에 충주 쌀을 운반해 오기도 했다. 양가 집안에서는 3대 독자의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길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처음에 가장 격렬하게 결혼을 반대했던 유 진사는 성부자의 신분을 이유로 순자와의 혼인을 반대했지만, 이제는 아들 귀한 자신의 집안에 순자가 복을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제 양가의 갈등은 순자의 태중 아기로 인해 완전히 해소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갈등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순자의 고종사촌인 순복 때문이었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성부자 댁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던 순복은 성부자의 가장 든든한 오른팔이었고, 성부자가 운영하는 여러 점포의 점장이기도 했다. 성부자가 회계장부를 맡길 정도로 신임하던 순복은 갑작스레 성부자의 첫째 사위로 들어오게 될 그가 탐탁지 않았다.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이 빼낸다고 혹시나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사촌들 중 가장 아끼던 순자를 단숨에 낚아채 간 놈이 그였다는 데 대한 질투 역시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행동은 유치하면서도 노골적이었는데, 자주 성부자 댁에 방문하는 그를 "뭘 얻으러 오셨나? 샌님께서?" 하며 노려본다거나 자신의 숙부인 성부자에게 "저런 놈 믿으시면 안 됩니다. 우리 집안의 재물을 노리고 들어온 놈이에요."하고 이간질을 부린다거나 하는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태도에도 그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되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를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성부자의 일을 도와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순복과 친해지려 노력했고, 순복은 그럴수록 그가 더욱 미워 그를 멀리했다.


  어느덧, 양가의 혼례 일자가 잡혔다. 최대한 길일을 택해 6월 27일로 정한 두 집안은 다음 날의 큰 행사를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더랬다. 그는 순자와 혼인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가 혼례복을 입은 모습은 달과 별마저 빛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가 기러기를 그녀에게 건네고 두 사람이 이제 합환주를 마시려 하는데, 서로의 표주박 잔을 연결한 끈이 뚝 하고 끊겨버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순복이 눈앞에 나타나 자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다 너 때문이야!"


  그와 동시에 천지를 진동하는 사이렌 소리가 윗동네 아랫마을 할 것 없이 울려 퍼졌다. 학교나 관공서에서 울려 퍼지는 사이렌 소리였다. 새벽 어스름이 풀리기도 전인 시각에 잠을 자던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 집집마다 불을 켰다. 그가 살고 있는 아랫마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악몽을 꾸고 사이렌 소리까지 들으니, 뭔가 상황이 불길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다. 그는 얼른 안채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가서 많이 놀라지 않으셨는지 안부를 여쭸다. 잠시 후,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옷을 갖춰 입고 나왔다. 아버지 유 씨의 안색도 꽤나 어두운 것이 뭔가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듯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틀림없구나. 어서 라디오를 틀어 보거라."

  "예, 아버님."


  그가 라디오를 틀자, 지지직거리면서 뉴스 진행자의 안내방송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괴뢰군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을 시작, 현재 38선 전역에 걸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6월 27일 새벽 현재 이승만 대통령은 ..."


  그와 그의 부모,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았다. 세 사람은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다가 제일 먼저 입을 뗀 사람은 그의 어머니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전쟁이라니요..."


  그의 어머니는 불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아직 전세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지 않소. 게다가 이곳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화성이 아니오. 추후에 상황을 지켜보고 움직여도 늦지 않소."

  "아버님, 그래도 장인어른 댁에 연락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할 줄 압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날이 밝은 대로 집사를 시켜 사돈댁에 연락해 보기로 하자."

  "대감, 그러면 오늘 혼인하기로 한 것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전쟁이 터진 마당에 혼인이 다 무엇이요? 일단은 두 집안이 합심해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오."


  그는 자신의 방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려고 했지만, 도무지 불안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윗마을의 순자네도 지금쯤 전쟁 소식을 들어 알고 있을 텐데, 순자가 얼마나 놀랐을지 걱정이 되었다.


  날이 밝자, 아버지 유 씨는 윗마을 성부자 댁에 집사를 보내 상황을 파악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상인인 성부자가 정보에 빠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유 씨는 아버지 유 진사 이하 집안의 남녀노소 하인이며, 일가친척을 모아놓고 말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켰다 하니, 아무래도 작심하고 온 모양이다. 금방 끝날 전쟁이 아닌 것 같으니, 다들 사돈댁에서 집사가 돌아올 때까지 두문불출하고 있거라."


  한편, 윗마을 성부자 댁에 갔던 집사가 돌아와 유 씨에게 말했다.


  "성 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수도 서울 코앞인 의정부까지 와 있답니다. 데 전황이 매우 불리하다고 합니다. 이는 수원의 맥아더 사령부에서 일하는 사람에게서 얻은 알짜배기 정보라고 했습니다. 한편, 성 부자께서 아는 분 중에 여수에 사는 상인이 있는데, 그리로 가면 안심할 수 있다 합니다. 성부자께서 함께 피난하실 뜻이 있는지 대감의 의중을 여쭤봤습니다."

  "인민군이 서울 문턱까지 와 있다면 이곳 화성도 위태롭다. 서둘러 피신하는 게 좋겠지. 그렇지만 여수는 너무 갑작스럽고..."


  아버지 유 씨가 고민하고 있자, 그가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하려 했다.


  "아버님, 이 상황에 믿을 건 가족뿐이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이런 정보를 알아낸 것도 장인어른이지 않습니까? 장인 어른댁과 뜻을 같이 해서 여수로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때, 뒷짐 지고 서 있던 할아버지 유 진사가 나서며 버럭 소리쳤다.


  "성씨들의 말만 듣고 우리 집안의 연고도 없는 여수까지 가서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그러느냐? 아범아, 차라리 부산으로 가는 것이 나을 성싶구나. 부산이라면 여차하면 일본으로 피신할 수 있지 않겠느냐."


  유 씨는 아버지 유 진사의 말에 잠시 고심하는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아버님 말씀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며늘아기,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해야 하니, 일단 여수로 피신했다가 전쟁 상황을 보고서 부산으로 향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제 네가 이 집안의 전권을 가졌으니, 네 뜻대로 하거라. 허나 만에 하나라도 상황이 불리해지면 반드시 부산으로 가야 한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걱정 마십시오. 그러면 이제 다들 여수로 가져갈 행장을 싸거라. 집사는 사돈댁에 가서 언제 출발할지 약속시간을 알아오게."


  집사는 다시 성부자 댁으로 향했다. 유 씨의 지휘 아래 다들 짐을 꾸리느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정오가 되어 집사가 돌아와 "오후 3시에 마을 경계 서낭당 앞에서 만나자고 하십니다."하고 보고하자, 유 씨는 집안사람들에게 서두르라고 재촉했다.

  이윽고 오후 3시가 되어 양쪽 집안이 서낭당 앞에 모였다. 색색깔의 천들이 족히 백 년은 넘는 큼지막한 나무를 휘감고 있었는데, 전쟁통이라 그런지 그 모습이 왠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는 몸종의 부축을 받으며 뒤뚱뒤뚱 걸어오는 순자를 보자, 일행들 틈에서 뛰쳐나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기 생각에 그녀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배는 저번 봤을 때보다 조금 더 불어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여수에 가면 괜찮을 것이오. 힘들더라도 그때까지 조금만 버텨봅시다."

  "예, 서방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아기도 힘낼 겁니다."


  아직 혼인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양가 어른들은 서로를 이미 사돈이라고, 태경과 순자 역시 서로를 부부라고 여기고 있었다.

  양가 일행은 수원역에서 여수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산길을 지나서 행장을 지고 부지런히 걸었다. 저녁 6시가 되어 수원역에 도착한 그들은 수많은 인파에 한 번 놀라고, 여기저기 기차에 올라타려는 사람들의 아비규환에 한 번 더 놀랐다. 그가 기차표를 가지고 서 있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직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피난길에 오르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왜 그런 겁니까?"

  "거야 대통령마저 수도 서울을 버리고 도망간 마당에 이 전쟁에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거지. 그래서 다들 남쪽으로 피난 가는 거 아뇨."

  "대통령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갔다니, 사실입니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지. 이미 부산으로 피신했다던데?"


  그가 남자와 얘기한 내용을 아버지 유 씨에게 전하자, 유 씨가 탄식하며 말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 수도를 사수할 생각은 않고 국민들보다 먼저 도망을 치다니, 참 나라 꼴이 말이 아니구나."


  그때, 잠자코 아들과 손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유 진사가 유 씨에게 말했다.


  "아범아, 대통령도 부산으로 갔다던데, 그곳이 여수보다 더 안전하지 않겠느냐?"

  "물론 부산은 후방 도시고, 대통령이 있으니 안전하겠지요. 그렇지만 이미 사돈과 함께 여수에 가자고 한 마당에 쉽게 길을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일단 여수에 가 보시지요. 여수에서도 부산은 가깝습니다."


  유 진사를 설득한 유 씨는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 사돈인 성 부자를 찾았다. 성 부자는 집사를 시켜 양가 일행의 표를 막 구매하려던 참이었다.


  "사돈, 기차표를 사려고 하시는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역무원의 말로는 이미 승객이 다 찼다고 합니다. 입석으로라도 타려면 원래 기차표 가격보다 5배는 줘야 한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웃돈을 주고 살 밖에요."

  "이거 저희 일가까지 신세를 지게 되어 송구할 따름입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직 혼례는 올리지 않았지만, 양쪽 집안은 이미 가족이 아닙니까. 여수까지 당도하면 그때는 아이들 혼례도 시키고 태중 아기도 보셔야지요."

  "고맙습니다, 사돈."


  두 사람은 손을 꼭 마주 잡았다. 두 아버지들 간에 묵묵한 신의를 다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순자의 고종사촌인 순복은 성 부자의 세간 살림을 추려 가지고 하인들과 함께 수원역에 뒤늦게 도착했다. 성 부자의 땅문서들과 돈뭉치를 들고서 유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성 부자에게 다가왔다.


  "숙부님,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세간살이 정리하는 데 꽤나 애 먹었습니다."

  "이제 왔느냐. 고생했다. 이 분은 태경이 아버님 되시는 유 선생이시다. 인사하거라."

  "아, 그 샌님의 아버님이시구만요. 여수까지 와서 무엇을 훔쳐가려 하십니까?"

  

  순복은 반항적인 눈빛을 한 채, 유 씨에게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성 부자가 순복의 볼 따귀를 냅다 치며 말했다.


  "너, 그게 사돈어른께 무슨 말버릇이냐? 어서 사죄드리거라."

  "예, 예. 송구하게 됐습니다요."


  순복은 성 부자의 성화에 마지못한 표정으로 유 씨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유 씨와 성 부자가 있는 자리를 떠났다.


  "송구합니다. 저 아이가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허드렛일만 하며 크는 바람에 사람됨이 삐딱합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유 씨는 성 부자와 여수까지 가는 여정을 이야기하고 돌아와서 바로 아들 태경을 찾았다. 태경은 순자와 함께 있다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아까 보니 순복이라는, 순자의 사촌 말이다..."

  "아, 처남 말씀입니까?"

   "그래. 보아하니, 우리 집안에 대해 억하심정이 있는 것 같더구나."

  "예. 제가 성 부자 어르신의 사위가 되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입니다. 저희가 재물이라도 탐내는 줄 아는 것 같습니다."

  "내 보기엔 예의가 없고 오만불손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사람됨이 욕심, 시기, 질투가 많아 보이더구나. 네가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겠구나."

  "그렇지만, 아버님. 장인어른과 순자가 가장 믿는 사람이 바로 순복입니다. 제가 앞으로 처가와 잘 지내려면 순복 처남과 가까워져야 서로가 다 좋지 않겠습니까."

  "너는 다 좋은데, 마음이 여린 것이 단점이다. 가끔씩은 냉정하게 바라봐야 할 때도 있느니라. 명심하거라."

  "예, 아버님. 명심하겠습니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 너머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성 부자가 결국 기차표 시세의 10배까지 주고서야 얻은 자리는 양가 친척들이 앉은 좌석 칸과 하인들이 탄 입석 칸 두 곳이었다. 사람들로 꽉 찬 기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여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차창 밖으로 아직도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열차는 빠르게 남쪽으로 내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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