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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갈해리 Dec 03. 2022

초심(初心)

갈대

  나는 초심이 필요할 때마다 갈대숲으로 간다.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심각한 고민이 있을 때, 그럴 때 나는 홀로 갈대숲을 찾는다.


  갈대숲은 내 상처의 근원지, 내 심상의 첫 발자취였던 곳. 그곳에서 나는 온몸의 가시를 바짝 곤두세우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갈대숲에서의 나는 상처를 온전히 드러낸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온몸에 피를 흘리며 나 자신이 극한까지 아픔을 느껴야 비로소 갈대를 껴안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갈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곤 했다. 


  갈대야, 내 상처의 근원아, 내 첫 마음아, 너에게 긁히고 쓸리고 나서야 내가 아픔이란 걸 깨달아. 아픔이란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에는 나는 너를 껴안고 계속 고독의 피를 흘리고 있단다. 너는 내 존재의 나침반, 내 근원의 표상이야. 갈대야, 나의 심장을 꿰뚫어 나의 원초적인 고독을 깨닫게 해 줘.


  갈대숲을 지나면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무리들을 바라본다. 강한 바람으로 어느새 땅바닥까지 누워버린 갈대들. 나도 갈대들을 따라 땅바닥에 죽은 듯이 눕고 싶다. 그러나 갈대의 뿌리가 땅 속에 박혀 있듯 내 마음의 뿌리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불안해 보이지만, 굳건한 갈대처럼, 나도 그랬다.


  이제 서서히 바람이 잦아들고 있다. 이제는 갈대 무리가 한 뭉치가 되어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다. 나도 너희가 되어야지. 하늘을 노려보듯, 세상을 노려보며 내 필적을 남겨야지. 그렇게 다짐하는 또 하루의 갈대, 아니 또 하루의 초심. 아픔을 온전히 겪고 굳건히 서 있는 저 갈대들처럼, 내 상처를 오롯이 느끼며 오늘의 아픔을 초석 삼아 또 한 번의 발자취를 남겨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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