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마다 발령을 받아 이사할 수밖에 없는 대위 남편을 둔 윤진은 물리치료사 일을 하다가 다른 위관급 관사의 여자들처럼 관사에 들어앉아 집안일과 육아로 시간을 보낸다. 다른 여자들에게 선배, 후배라고 부르는 상하 관계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따돌림이나 배척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배, 후배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러던 어느 날, 벨 소리가 울렸는데도 문밖에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을 보면서 윤진의 일상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남편은 평소보다 일찍 함선에서 복귀하게 되고, 그녀는 평소답지 않은 남편의 모습에 의문을 품게 된다. 게다가 검은 망사의 여자(모두에게 사모라고 불리는)는 쥐를 찾기 위해 땅에 구멍을 파고 다니면서 그녀에게 해군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녀는 애써 이 일들을 무시하려 하지만, 자신을 피하는 관사의 여자들이 신경 쓰이고, 남편이 말하지 않은 진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러한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 그녀는 싱크대 하수관에서 '찍' 하는 쥐 소리를 듣게 되고, 쥐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자신을 찾아온 선에 의해 그간의 자초지종을 알게 되고, 타는 냄새를 쫓으니, 화단의 구멍마다 불이 솟구친다. 남자들이 불을 끄려 하지만, 불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리고 쥐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작품 감상
누구나 불안을 가지고 살아간다. 긍정적이면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던 사람도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여러 번 포착되면 불안을 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진실이 어떤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을 때, 인간의 불안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결국 진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진실을 따르고 불안을 해소할 것인지, 아니면 진실을 회피하고 불안을 품고 살 것인지. 그러나 진실을 선택하면 불안은 해소하겠지만, 부와 명예를 누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진실을 회피한 채 불안을 품고 살면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사는 것이 과연 나은 삶일까.
전지영의 <쥐>는 진실과 그 진실을 맞닥뜨린 인간의 불안과 공포에 관한 이야기이다. 작품 제목의 '쥐'는 스스로의 방향 감각을 상실해 버린 여자들의 불안과 공포를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검은 망사 여자의 말 '보이는 것이 항상 답은 아니다.'처럼 철저히 은폐되고, 왜곡되는 것이 바로 진실이다.
특히, 해군과 같은 폐쇄적인 조직에서는 그 진실이 은폐, 왜곡, 날조, 회피되기 마련일 것이다. 분명히 실종자 한 명이 있었음에도 상부의 명령으로 '전원 복귀'를 선택한 윤진의 남편과 실종자를 밝힘으로써 제대하게 된 선의 남편. 둘 중에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일까.
또한, '보이지 않는' 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불안은, 서서히 극대화되어 기정사실처럼 되지만, 결국에는 불이 솟구치는 구멍 속에서 쥐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힘'은 그만큼 사람들의 마음속에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문이 아닌,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해군의 스토리와 쥐의 스토리가 교차되면서 작품 속 긴장감이 고조되었는데, 작가인 전지영은 이런 교차 기법을 현명하게 잘 사용한 것 같아 보인다. 해군의 스토리만 나왔다면 진부하거나 딱딱했을 텐데, 쥐의 이야기가 나와서 플롯이 풍성해지고,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좀 더 잘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검은 망사 여자의 스토리가 좀 더 등장했다면 쥐의 서사나 해군의 서사를 이해하기 쉬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