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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풀 Oct 03. 2020

숲에서 만난 도토리

가을의 씨앗들 ⓒ 바람풀


여리고 풋풋했던 열매들이 땅으로 돌아가는 계절, 지금 숲은 가을 냄새로 가득 차 있다.

훌러덩 모자가 벗겨진 도토리를 주워 손바닥 위에 올려본다. 굴참나무 도토리는 아가의 얼굴처럼 반질반질 윤이 나고 벗겨진 깍정이는 바람에 나부끼는 아가의 머리카락 같다. 졸참나무 도토리는 작은 빵덕 모자를 야무지게 눌러쓴 새침한 소녀의 얼굴 같다. 


도토리 도토리 하고 자꾸만 이름을 부르면 나도 도토리처럼 귀여워지는 것 같다. 이 작은 열매가 모여 쫄깃쫄깃 맛난 묵이 된다니 '도토리야, 넌 정말 대단한 아이구나' 하고 듬뿍 칭찬해주고 싶어 진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집 옥상 위에는 도토리가 가득 널려 있었다. 엄마는 크고 납작한 돌로 도토리를 굴려 껍질을 깠다. 녹슨 작두 펌프가 있던 마당 한편엔 도토리 앙금을 내리던 커다란 고무 다라가 곳곳에 있었다. 껍질 깐 도토리가 가득 담긴 붉은 다라에 마중물 한 바가지 붓고 엄마는 열심히 펌프질을 해서 물을 채웠다.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탄생한 고운 묵가루. 물 한 컵 붓고 살살 저으면 탱글탱글 쫄깃한 묵이 되었다. 양념간장 발라진 묵을 얌 하고 집어 먹으면 입안 가득 가을이 넘실거렸다.

 

아파트로 이사해서도 엄마는 도토리를 주워 해마다 묵을 쑤었고 내게도 가루를 나눠주셨다. 그때는 귀한 줄 몰랐다. 언제든 얻어먹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두 번 묵을 쑤어 먹다가 그마저도 귀찮아 묵가루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고, 다용도실 선반 구석에서 몇 년간 방치된 가루를 발견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누가 안 보나 주위를 살핀 뒤에 땅을 파서 조용히 가루를  묻었다.


(2014년 9월 19일 맑음)
오늘도 도토리를 깠다.
나에게는 도토리가 친구다.
도토리가 올해 많이 열어서 딸이 날마다 주워온다.
나도 사동골 가면 한 망태 주울 텐데 숨차서 산에 못 간다.  


(2014년 9월 26일 흐림)
날씨가 흐려서 하루 종일 들어앉아서 도토리를 깠다.
돌에 놓고 망치로 깨서 깠다.
아주 껍데기가 딱 붙어서 그냥은 안 까진다.
전에는 도토리 줘다가 묵 개서 그걸로 때 살았다.
말린 걸 삶아서 물궈서 그걸로 때 살고,


(2016년 10월 5일)
올해도 산에 도토리가 많이 떨어졌다.
날마다 도토리 까는 게 일이다. 망치로 깨서 깐다.
안 깨면 못 깐다. 반들반들해서.
돌멩이 위에 놓고 망치로 때리는데 자꾸 뛰나가서
에유 씨팔 뛰나가긴 왜 자꾸 뛰나가너 하고 욕을 하고는
내가 웃었다.


이옥남 할머니가 쓰신〈아흔일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 을 보면 도토리 이야기가 나온다. 글씨 좀 이쁘게 써 볼까 하고 날마다 일하고 집에 돌아와 30년 넘게 일기를 쓰셨다는 옥남 할머니. 평생 도토리를 친구로 여긴 할머니가 이제 숨차서 산에 못 간다고 하시니 내 마음도 짠해진다. 도토리 한 자루 가득 짊어지고 산에서 내려오다 참나무 아래서 마지막 숨을 거두신 아랫집 할머니도 생각난다.


귀한 줄 몰랐던 엄마의 도토리묵을 이제 더 이상 먹을 길이 없다.

옥남 할머니도 우리 엄마도 이맘때면 다람쥐처럼 신나게 도토리 줍던 시절을 떠올리시겠지.

올망졸망 도토리 친구를 못 만나 서글프겠지.  


도토리 알 몇 개를 손에 꼭 쥐며 퍼뜩 생각해본다.

'나도 도토리 주워서 말리고 껍질 까고 갈아서 묵 한 번 쑤어 볼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의심의 눈초리로 내 마음을 훑는다. 못하라는 법도 없지. 


우리 어머니들 돌아가시면 정성 가득한 그 맛난 것들 이제 어디서 얻어먹을까 싶어 진다.

사라지는 멸종 동물처럼 잊히고 묻히는 것들이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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