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몸이 천근만근이다. 회사에서 치인 하루, 머릿속엔 온갖 피로가 쌓여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그래, 주말이면 그녀를 볼 수 있다. 그 생각 하나로 오늘을 버틴다. 마치 힘든 하루 끝에 마시는 한 잔의 위스키처럼, 그녀는 내게 주어진 보상 같은 존재였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사랑을 기대했다. 지겨운 상사의 잔소리, 끝없는 야근, 숨 막히는 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주말에 그녀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만나면 모든 피로가 씻겨 내려가야 했다. 나를 위로해 주고, 따뜻하게 안아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줘야 했다. 그래야 이 답답한 일상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대했던 것만큼 충족되지 않으면 금세 실망이 밀려왔다. 그녀가 피곤한 얼굴로 나를 만나거나, 내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는 것 같으면 속이 상했다. 사소한 말투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난 이렇게까지 기다렸는데, 너는 왜 내 기대만큼 해주지 않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사랑을 줄 땐 기꺼이 줬다. 애정을 아끼지 않았고, 표현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을 돌려받길 바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너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 거야? 왜 나는 매번 더 사랑하는 쪽이어야 해? 그렇게 불평이 쌓이면서 그녀는 점점 내 사랑을 받는 일이 부담스러워졌다.
그러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네가 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네가 원하는 역할을 내가 해주길 바라는 것 같아.”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끝났다.
이별 후에야 알았다. 나는 사랑을 ‘주는’ 게 아니라, ‘거래’하고 있었다. 내 애정과 시간을 투자했으니, 상대도 그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면 실망했고, 결국 관계는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을 삶의 보상처럼 여기면, 상대도 결국 내 기대치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사랑은 그런 게 아니다.
진짜 사랑은 내 결핍을 채워주는 보상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와 꼭 맞아떨어지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 그대로 함께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되니 문득 그녀와의 순간들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 불안을 덜어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사랑이란 꼭 주고받는 균형이 맞아야 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건, 함께할 때 편안한가,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는가. 사랑은 기대나 보상이 아니라, 함께 걸어갈 사람과의 여정이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하면서도 '나와 닮은 사람'을 찾고, '내 방식에 맞는 사람'을 기대한다. 그러나 연애는 결국 서로를 바꾸거나 맞추는 과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며 함께 걸어가는 일이다. 때로는 상대방의 말투나 습관이 낯설고, 작은 차이조차 서운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다름을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랑은 편안해진다.
사랑은 하나의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함께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나의 비어있는 조각을 채워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모양 그대로 조화를 이루는 것. 결국 사랑은 누구에게 기대거나 기대받는 것이 아니라,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게 더 편안하고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