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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자라나는 거리, 좋은 연애의 온도

by 성준

사랑에 빠지면 모든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진다. 자고 일어나서 가장 먼저, 잠들기 직전 마지막까지.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이 궁금하고, 내 하루의 빈틈을 전부 그 사람으로 채우고 싶어진다. 그게 진심이고, 사랑의 밀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아 깨닫게 된다. 함께 있는 시간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연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를 가득 채워야 할 시간이 어느 순간, 타인의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시간으로 바뀐다.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 오히려 불안이 되고, 그 불안은 ‘확인’이라는 이름의 감시로 바뀌고 만다.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더 많이 보고 싶고, 더 많이 알고 싶고, 더 많이 함께 있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사랑보다 불안이 앞선 것이다.


좋은 연애는 같이 있을 때가 아니라, 떨어져 있을 때 드러난다.


그 사람과 며칠 만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 관계. 연락이 조금 뜸해도 믿음이 무너지지 않는 관계. 친구들과 저녁을 보내는 그 사람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관계. 함께하지 않는 그 시간에조차 서로를 존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사랑은 자리를 잡는다.


나를 잃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은 것을 공유한다. 일상, 시간, 말투, 취향, 심지어 감정까지.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라는 개별성은 점점 옅어진다. 그리고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친다. 나는 지금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걸까, 아니면 나를 잃고 있는 걸까.


연애 초반,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하고, 만날 약속을 세우고, 잠시의 공백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바쁘고 지쳐 있을 때, 잠깐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스럽던 그 감정의 이름이 ‘사랑’은 아니었다는 걸. 그것은 불안이었다. 상대가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하는 나의 부족함이었다.

사랑은 곁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감정이어야 한다.


연인의 부재가 곧 사랑의 부재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떨어져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혼자 카페에 앉아 책을 읽는 일, 조용히 산책을 하거나, 오롯이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는 일. 그런 순간들이 사랑을 더욱 단단하게 만든다. '나'라는 존재가 충분히 건강할 때, 그 '우리'라는 공간도 건강할 수 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은 관계의 여백이다.


여백이 없는 문장이 숨 막히듯, 여백 없는 관계는 어느 순간 버거워진다. 서로가 조금씩 비워낸 틈 사이로 바람이 지나고, 그 바람이 관계를 더 오래 지속하게 만든다. 대화를 멈추기보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이가 되는 것. 함께하지 않아도, 그 시간을 응원해주는 사이가 되는 것. 사랑은 채움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적당한 비움과 혼자의 시간이 있어야, 다시 마주할 때 설렘이 생긴다.

우리는 모두, 연애 중에도 ‘나’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 나만의 생각이 허락되지 않는 관계라면, 그것은 결국 ‘함께’가 아닌 ‘종속’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종속된 관계는 언제나 무너질 위험을 안고 있다.


좋은 연애는 나 자신을 잃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관계다.


그 사람의 곁에서도 나로서 편안할 수 있고, 떨어져 있어도 내 삶을 충실히 살아갈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거리를 서로가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다면. 그 사랑은 오래 간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서로의 품 안에서만 자라는 줄 알았다. 붙어 있어야 안심이 됐고,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졌다. 하지만 진짜 깊은 사랑은 거리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자유롭게 놔둘 수 있는 힘에서 비롯된다. 매일의 일정이 겹치지 않아도, 서로의 스케줄에 일일이 간섭하지 않아도, 각자의 시간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 거리에는 오히려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은 각자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해준다. 나는 나대로의 삶을 가꾸고, 너는 너대로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하루가 끝나고 다시 만났을 때, 우리는 할 이야기가 생기고, 나눌 감정이 쌓여 있다. 함께 있는 시간이 특별해지기 위해서라도, 함께 하지 않는 시간이 충실해야 한다.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는 늘 곁에 있다는 느낌. 그것이 신뢰이고, 그것이 진짜 관계의 깊이다. 외로움이 아니라 여유, 불안이 아니라 존중, 집착이 아니라 기다림으로 채워진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랑을 더 단단하게, 더 오래도록 지켜낼 수 있다.


그러니 기억하자. 매일 붙어 있는 사랑보다, 떨어져 있어도 편안한 사이가 더 귀한 법이라는 걸. 그리움이 쌓여갈 틈이 있는 연애야말로, 다시 만났을 때 눈빛이 깊어지는 연애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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