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를 시작할 때, 누구에게나 설레는 순간들이 있다. 어색하지만 괜히 눈을 마주치게 되고, 말 한마디에 얼굴이 붉어지고, 문자 하나에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그런 시간. 그런데, 간혹 이상하리만치 능숙한 사람을 만나게 될 때가 있다. 첫 데이트인데 마치 수십 번의 데이트를 해본 듯한 태도. 말투는 능글맞고, 손동작 하나까지 계산된 듯 자연스럽다.
그녀는 모든 것이 익숙했다. 마치 이런 첫 만남에 능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테이블에 앉기도 전에 대화를 리드했고, 자기소개도 자연스러웠다. 대화가 어색할 틈이 없었다. 그녀는 질문을 잘 던졌고, 대답도 적당히 감탄사가 섞인 말투로 이어갔다. 웃는 타이밍도 완벽했고, 리액션도 하나같이 모범답안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지금 이 시간이 정말 나만을 위한 만남인지, 아니면 백 번쯤 해본 누군가와의 또 다른 리플레이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녀의 능숙함은 매끄럽고 부드러웠지만, 그만큼 마음이 닿는 느낌은 희미했다. 마치 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연애를 잘 해내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능숙함은 분명 매력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나는 마치 이 연애에서 '구경꾼'이 된 기분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의 행동은 자연스러웠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랑은 어색함 속에서 피어나야 진짜다. 너무 매끄러운 말에는, 그 사람의 오래된 레퍼토리가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 대사를 나에게 처음 한 걸까, 아니면 이미 수없이 반복해본 것일까. 그 질문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도 그랬다. 따뜻한 조명 아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고, 메뉴를 고르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오빠, 웃을 때 되게 귀엽다." 순간 멈칫했다. 분명 듣기 좋은 말이었고, 그 순간의 분위기에도 어울렸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마치 이 대사를 오늘만 해본 게 아니라는 듯, 너무 자연스러웠기에.
반면, 예전에 만났던 누군가는 모든 게 서툴렀다. 식당 문을 열 때마다 먼저 들어가야 하나, 뒤따라야 하나를 고민했고, 커피 하나를 고르는데도 다섯 번은 질문을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처음엔 답답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서툼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진심이 고개를 내밀 때는 늘 조금 어설펐다. 능숙한 멘트보다, 서툰 진심이 오래 남는다.
너무 잘 아는 사람, 연애의 흐름을 계산처럼 이어가는 사람은 매력적일 수 있다. 처음엔 설레고, 호기심도 자극된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질수록 공허함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내가 빠진 줄 알았던 그 마음의 웅덩이는, 사실 상대에게는 깊이가 없는 얕은 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감정을 설계했고, 연애를 하나의 연기로 치장했다. 그 안에는 내가 없었다. 있는 것은 오히려 ‘연애’ 그 자체에 대한 중독, 관계를 통해 채우고 싶은 공허함일 뿐이었다. 감정의 온도가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건, 그녀가 너무 차가워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나를 향해 있던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짜 매력은, 진심이 어설프게 드러나는 사람에게 있다. "이런 말 해도 되나?" 하고 조심스레 꺼내는 말, 아무렇지 않은 듯 보내지만 몇 번이나 수정했을 것 같은 메시지, 혹은 웃다가 갑자기 진지해져 버벅이는 눈빛. 그런 사람의 감정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감정은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건네질 때, 더 진짜 같아진다.
나는 그런 사람과 오래 남았다. 완벽한 대사보다, 한참 뜸 들이다가 꺼낸 말 한마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 말은 대본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왔기에. 그녀가 날 바라보는 방식, 천천히 알아가고 싶어 하던 눈빛,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 그냥 옆에 머무는 태도. 그건 누구에게나 익힌 기술이 아니라, 오로지 나에게만 있었던 마음이었다.
능숙한 사람은 멋있다. 하지만 멋있다는 감정은 종종 ‘지나간다.’ 반면, 서툴고 조심스러운 사람은 마음에 잔상을 남긴다. 그 조심스러움이 관계를 아끼는 방식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너무 완벽한 시작보다, 서툰 시작이 오래 간다.
사랑은 누구보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 누구보다 마음이 진심인 사람과 시작되어야 한다. 너무 쉽게 빠지는 감정은, 그만큼 쉽게 사라지기도 한다. 그 말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늘 해오던 이야기의 일부였는지, 우리는 처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미묘한 감정은, 연애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익숙한 멘트보다, 낯선 진심을 택해야 한다. 사랑은 연기처럼 잘하는 게 아니라, 어설퍼도 진심이길 바라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