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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24. 2024

99번의 환생.

10화. 동방삭의 첫사랑.

-서기 23년.


고구려 변방인 연해주에 위치한 동녕성 성주인 동방삭의 생일을 맞아 성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성주인 동방삭은

금일 약관에 이르렀지만 혼인을 하지 않았고 전략적 요충지인 동녕성과 연맹을 맺기 원하는 나라들이 앞다퉈 혼약을 통한 동맹을 제의해왔다.  하지만 전란으로 양친 부모를 한날한시에 잃고 일찍 성주가 된 그는 그 어느 곳에도 그럴듯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의 생일 축하연을 기회 삼아 각국의 사신과 동행한 각 나라의 공주들이 모여든 탓에 성의 중앙광장에 위치한 연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동방삭은 삼중으로 설계된 동녕성의 가장 안쪽 내성 망루에 서서 중앙광장을 내려다보았다.  한껏 멋을 낸

각국의 공주들은 이미 마련된 좌석에 앉아 성주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시선이 가지 않는 그는 저 멀리 저무는 노을을 바라볼 뿐이었다.  망루의 깃발이 바람에 거세게 펄럭일 때 성주의 망토자락도 바람에 흩날렸다.  무기라고는 단 한 번도 잡아본 적 없어 보이는 엷은 몸피에 핏기 없는 그의 하얀 얼굴에도 노을이 물들었다.  


'내가 무예를 갈고닦았다면 부모님을 구할 수 있었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지만 생일인 탓인지 그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겨우 열 살짜리가 무예를 익힌 들 무얼 할 수 있었겠어?'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십 년 전 신나라의 십만 대군이 쳐들어왔을 때 그의 아버지는 급히 봉화 불을 올렸지만 원군이 도착하기 하루 전 성은 적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성에 난입한 적군의 칼날 아래 살아남은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동방삭은 그날 살아남았다.  그는 그날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다가오는 죽음으로부터 피할 수 있을 뿐 누군가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부모님을 찾아온 죽음이 그들을 데려가는 것을 두 눈앞에서

지켜봐야했다.  

죽음을 볼 수 있게 된 그날부터 웃지도 울지도 않는 무표정한 가면과 같은 얼굴을 지닌 그가 망루에서 내려와 연회장 좌석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뒤였다.  


그의 착석을 확인한 각국의 사신들은 앞다퉈 건배를 제의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채운 술잔을 들어 올렸을 때 그의 코에서 코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시종들이 당황해서 그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할 때 그의 코 아래에 비단 손수건을 대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허약한 몸에 짜증이 치밀어올라 코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있던 동방삭은 손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감싸는 손의 따뜻한 체온을 느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했을 때 표정 없는 그의 얼굴에 의아함과 놀람이라는 표정이 흔들림 없던 그의 가면을 깨고 떠올랐다.  


"성주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제 아내가 마음이 앞서서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의 앞에 동녕성의 정예군 장군인 연개휼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했다.  

하지만 정작 그 순간 동방삭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을 보게 된 이후로 온통 암흑만 가득한 불 꺼진 집과 같았던 그의 마음에 환한 불이 켜진 것만 같았다.  추위를 떨칠 수 없지만 성냥이 켜져 있는

그 몇 초 동안 행복했던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는 그 빛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홀린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저는 연개휼 장군의 부인 수련이라 합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부인인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를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은 마음에 연개휼장군을 적지에 내보냈고 미리 약속된 매복에 당한 그가 시신으로 돌아왔을때 그녀를 위로한다는 명분으로 그녀의 집에 찾아갔다. 하지만 그 집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대문 안쪽으로 다가오는 죽음이었다. 남편의 시신을 끌어안고 독약을 삼킨 수련을 데려가는 죽음을 본 그가 할 수 있던 유일한 일은 앞서 걷는 죽음의 뒷쪽에서 그녀의 목에 자신의 옥염주를 걸어준 것이 다였다.

후로  오랜 시간을 그는 죽음을 피해 수련의 환생을 찾아다녔지만 그가 그녀를 찾을 때마다 매번 그녀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2023년을 사는 수련을 만난 동방삭은 이제 마지막인 이번만큼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앞에 앉아 연고의 포장을 뜯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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