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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찐빵 Sep 02. 2019

느리다는 죄로 죽어야 하는 세상에서.

이야기의 시작 

그러니까 나는, 조금 느리다는 죄로 죽어야 하는 세상을 걷고 있었다. -웹툰 플랫 다이어리 中    

  

나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주 3일 일한다. 하루 8시간 근무하지만 일이 빨리 끝나면 일찍 들어가기도 해서 주 24시간을 넘어가진 않는다. 전 직장 업무가 경력으로 인정돼 최저시급보다 조금 더 받고 일하고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20대 젊은이는 왜 이렇게 적은 시간 일하는 걸까. 한창 돈 벌 나이에 뒤쳐진다는 걸 모르나?라고.     


이렇게 된 데에는 약 4년의 사회생활과 건강이 큰 영향을 미쳤다. 첫 직장을 3주 만에 때려치우고 나는 내가 밥을 벌어먹고 살지 걱정스러웠다. 다행히 프로취업러에 프로퇴사러라서 쉼 없이 노동을 했다. 재직 중에는 회사원, 퇴사 후에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얻고 건강을 잃었다.      


2번째 직장에서는 조금만 먹어도 뱃속이 부글대며 가스가 차고, 잦은 복통을 겪어서 틈만 나면 화장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전 직장에서는 출근길에 숨이 잘 안 쉬어지고 불안한 증상을 종종 겪었는데, 몸조차 위염과 장염을 달고 살아서 숨 쉬는 것도 버거웠다. 2018년 일기장에는 온통 버텼다는 말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전 직장은 지금까지 다닌 직장 중 연봉과 상여금이 제일 높았음에도 만족도는 떨어졌다. 내게 주 40시간의 쳇바퀴는 가혹해서 저축액이 빠르게 불어난 만큼 마음은 빠른 속도로 바닥으로 치달았다. 나도 무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현실은 집-직장의 무한반복이었다. 그래서 여행을 가고, 마사지를 받고, 책을 사고 뮤지컬을 보러 다녔지만 어딘가 막힌 듯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소비가 가져온 행복은 찰나였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라는 책을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일, 돈, 관계, 꿈 등 무엇에라도 중독되어야 힘든 현실을 버티는 세상에서 중독을 끊으려면 관계와 경험의 회복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일’에 내 생체리듬을 맞춰놓고 사는 게 진절머리가 났다. 월급을 대가로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일상을 더는 잃고 싶지 않았다. 적게 벌더라도 내 능력으로 자립하고 싶어서 퇴사를 준비했다.      




퇴사하고 반년 간 백수로 지낼 비상금을 모아뒀는데 감사하게도 지금 직장을 만나서 주 3일 일한 지 두 달째다. 일에 치이고 아픈 몸에 치여서 퇴근 때는 무표정이었는데 지금은 웃으며 퇴근한다. 타임 리치(time rich)라서 집안일을 함께 할 수 있고, 느긋하게 은행 업무를 본다. 가족과 친구들의 깊고 얕은 이야기에 충분히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어서 좋다.     


소비 대신 경험에 가치를 두니 많은 돈이 필요치 않았다. 좋아하는 도서관에 예전보다 자주 간다. 글쓰기 수업을 들었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모임을 가진다. 독서모임도 참여하고 있고, 오랫동안 못 본 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냈다. 주말에는 엄마와 데이트 겸 산책을 즐긴다. 아빠는 응급실에 실려가 수십 만원치 검사를 받고 또 퇴원해서 출근하던 딸 대신 매일 헤실 거리면서 조잘조잘 일상을 이야기하는 딸에게 처음으로 응원을 보냈다. 네 모습이 참 보기 좋다고.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상의 소중한 관계를 회복한 것으로도 마음은 엄청난 안정을 얻었다. 직장인에게 필요한 건 단순히 퇴사! 가 아니라 고립에서 벗어나 관계를 회복하고, 만족할 정도의 근무를 하며 좋아하는 것을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는 삶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같은 생각을 많이 한다. 반드시 승자와 패자가 나눠져야 하는 세상에서 거북이처럼 느린 내가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에 대해.     


2년 전 봄바다에서 만난 거북이. 아니면 자라.


좋아하는 글을 읽고, 쓰는 삶. 필요한 만큼만 일하고, 소중한 이들과 관계를 이어가되 집착하지 않는 삶. 크고 작은 고민에 충고를 던지는 대신 들어줌을 택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게 정말 가능한지 실험해보기로 했다. 목표기간은 1년. 실험대상은 거북이인

    

거북이인 나는 원래 느리다. 그래서 무한경쟁 사회에서 내게 맞는 선택을 내렸다.


느리다는 것도 죄가 되는 세상에서 탈주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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