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눈다운 눈을 보았다. 10일 새벽 서울에 첫눈이 왔다고 하지만 내겐 이 눈인 첫눈이다. 그것도 늦깎이 첫눈이다. 보통 11월 말에 첫눈이 내리는데 올해는 여름 내내 엄청난 비를 내뿜느라 하늘이 기력이 쇠했는지 강설(降雪)이 이렇게 늦었다.
덕분에 내가 사는 방 창밖으로 맞은편 빌라 옥상이 눈으로 하얗게 장식되었다. 겨울에만 만들어지는 소품. 이 옥상정원의 주인 할머니는 먹거리가 되는 갖가지 식물들이 싹을 틔우고 잎을 내며 꽃을 피우도록 온갖 정성을 다해주는 모습을 봄부터 가을까지 내게 보여주었다.
차[茶]를 샀다. 몸이 냉한 나에게 몸을 데워주는 생강차와, 숙면에 도움이 되는 캐모마일 차. 그동안 유일하게 카누 커피만 커피 잔을 채웠는데, 이 겨울 생경한 친구들이 책장 한 칸을 차지했다.
나는 과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족모임에서 후식으로 나오면 살짝 손을 대는 정도다. 물론 과일이 숙성돼 주(酒)가 된 것은 환영이다. 돈을 주고 과일을 사다 먹는 일은 결코 없다. 그러다 귤을 사게 되었다. 사야만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니 전자레인지 청소에 귤껍질이 최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두 개만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파는 곳은 없어 20개를 사야 했다. 겨울에 제철 찬 귤을 먹으니 정말 시큼했다. 전자레인지에 귤껍질을 넣고 1분 30초간 데우니 깨끗하게 청소가 되었다. 남은 귤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하루에 한두 개씩 까먹고 있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12월 들어 읽는 책이 세 권 있다. 프랑스어 표현과 관련한 어학 서적 한 권. 두 일본 소설가가 세계문학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은 것을 엮은 『필담』.
그리고 몇 달 전 번역 참고용으로 샀다가 이제서야 찬찬히 읽고 있는 『식물의 이름이 알려주는 것』. 이 책 택배 박스 안에 식물 그림이 그려진 다섯 장의 카드가 동봉돼 있었다. 그중 하나가 ‘무화과나무’ 카드다. 꽃이 피지 않는다고 잘못 알려진 나무. 책엔, 잎겨드랑이에서 항아리 같은 꽃차례가 나오는데 그 꽃차례 안쪽에서 피기 때문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 빽빽할 정도로 꽃이 많이 핀다고 소개돼 있다. 세상에! 이 꽃이 진 후 이 꽃차례가 과실로 익어 무화과 열매가 된단다. 뭉뚱그려 말하면 꽃이 열매로 변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무화과 열매를 먹을 기회가 생기면 꽃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오늘 창밖으로 노을 지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겨울의 태양은 남쪽으로 낮게 기울어져 동쪽에서 서쪽으로 빠르게 유영한다. 남향 창으로 눈이 부시게 햇빛이 들어온다. 방 한 칸이지만 내 5층 원룸 방은 햇빛이 좋다. 외출이 적은 나에게, 외출 자제를 권하는 요즘 시절에 5층까지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는 것도 복이면 복이다.
이전 원룸에서는 습기가 많이 차 미니 제습기를 구입해 사용했다. 지금 방은 볕이 좋아 쓰지 않다가 다시 꺼냈다. 겨울이 돼 창을 줄곧 닫아야 하기에 세탁기를 돌린 후 건조대 밑에 제습기를 틀어놓고 있다. 오늘도 그렇게 ‘장치를 해놓은’ 다음 산책을 나갔다.
그 산책길에서 공원에 새로 생긴 소품을 자세히 보았다. 나비와 꽃이 봄, 여름, 가을을 보내고 동면에 들어간 듯 벽에 굳게 붙어들 있다.
이외에도 스마트폰 장갑, 수면양말과 방석, 그리고 1년 내내 쓴 적이 없는데 몸이 건조해져 어쩔 수 없이 보디 오일을 샀다. 모두 ‘다이소’에선 산 저가품들이다. 요즘 같은 집콕 생활 시절에 이런 작은 소품들이 내 주변과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리고 오늘 반가운 전화 한 통이 왔다. 6개월 전에 결혼한 후배의 전화.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냐고 물으니 서슴없이 당연하다고 답이 돌아왔다. 자신은 서울에서, 신랑은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는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일 관계로 통화하게 된 것이지만, 내겐 귀중한 겨울 풍경이 돼주었다.
마지막. 오늘도 날씨가 좋아 서쪽 저녁 하늘로 사이좋게 붙어 다니는 목성과 토성을 볼 수 있었다. 2020년 겨울 또 하나의 귀중한 소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