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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신 Apr 03. 2024

단문과 미문이라는 조각칼

인천문학기행을 다녀와서

인천행 무궁화호 열차

내게 이번 인천여행은 무궁화호 열차 여행과도 같았다. 내가 사는 공릉동 공릉역에서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온수역까지 간 다음, 1호선으로 환승 후 인천역까지 갔다. 그런데 예매좌석에 있듯 두 시간 반 동안 앉아서 갔다.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물도 마시고 창밖도 내다보았다. 모든 종류의 열차와 더불어 지상 위의 지하철도 열차다.     


인천역에 가까울수록 속도는 줄어들고 승객은 가뭄에 콩 나듯 했다. 대신 새벽을 지나 활보 공간이 넓어진 아침 햇살로 가득했다. ‘대한제분’이라는 낯익은 명칭의 대형 공장이 보일 무렵 열차는 종착역, 문화재적 가치가 있어 증축을 하지 않아 간이역처럼 남아 있는 인천역에 도착했다.     



‘난쏘공’

이번 여행은 인천을 배경으로 한 조세희 작가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를 소재로 삼은 기행모임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은 단편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서울시 낙원구 행복동이라는 재개발지역 내 난장이 가족의 이야기이다.     

     

난장이에겐 두 아들과 딸이 있는데, <난쏘공>의 1장은 큰아들 영수, 2장은 둘째아들 영호, 3장은 막내딸 영희의 시점에서 서술되고 있다. 세 자녀의 각기 다른 시각으로 자신이 한 일들,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주변 환경을 소개하며 글을 얼기설기 얽고 있다. 집이 철거돼 은강시(인천시)로 오기 전의 일이다.    

      

위 사진은 사진작가 윤정미 님이 찍고 ‘한국근대문학관 기획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는 작품이다. <난쏘공>을 읽고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골라 “소설을 사진으로 각색”한 시도다. 난장이 가족은 부서진 집터에서 ‘빈곤의’ 식사를 하고 있다.           


두 번째 단편 <칼날>에서는 옆동네 이웃인 신애가 억울하게 거인 같은 사나이에게 구타당하고 있는 난장이 아저씨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약한 몸 어디에 끔찍한 시련을 이겨내는 힘이 감추어져 있을까 놀랄 정도였다. 이때까지 그와 그의 식구들은 더러운 동네, 더러운 방, 형편없는 식사, 무서운 병, 육체적인 피로, 그리고 여러 모양의 탈을 쓰고 눌러오는 갖가지 시련을 잘도 극복해왔다.(<칼날> 중에서)          



은강시

그 난장이 아버지는 자살을 선택했기에 은강시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추억으로만 나온다. 우리가 처음 그 흔적을 둘러본 은강시 북부지역의 구체적 모습은 일곱 번째 소설 <기계 도시>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영수, 영호, 영희가 일한 그 기계 도시의 현재 모습을 둘러보았다. 활처럼 둥그렇게 휘어져 있는 경인선 전철 너머 인천시 동구 만석동이 그곳이다.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지만 이 북부 공업지대를 위한 산업철도가 따로 있었다고 한다.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에서 소녀를 비롯한 꼬마 무리들이 조개탄을 훔치는 곳도 이 산업철도였을 것이다. 이 주변이 다 매립지역이라는 게 놀라웠다.    

      

난장이 아내와 자식들이 이사해 살았던 만석3차 아파트를 위한 용지, 만석어린이공원, 동일방직 사택, 공원(노동자)들이 가족들에게 돈을 송금하기 위해 수없이 들른 만석동우체국도 살펴보았다.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에서는 밤샘 작업하다가 깜박 졸고 있는 영희의 팔에 반장이 옷핀으로 찔러 깨우는 장면이 나온다. 가슴 아픈 내용이다.          


‘중국인 거리’

인천역 주변으로 돌아와 한국근대문학관으로 향했다. 우선 기획전시실을 관람했다. <난쏘공>과 더불어 위와 같이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 사진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한 ‘검둥이’ 미군이 2층에서 던져버려 죽고 만 ‘양갈보’ 매기언니의 시신을 작품화했다.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절 주인공 소녀는 이 사건 이전, 성당(지금의 답동성당)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일정한 파문과 간격으로 한없이 계속되는, 극도로 절제되고 온갖 욕망과 성질을 단 하나의 동그라미로 단순화시킨 그 소리에서 한밤중 꿈속에서 깨어나 문득 듣게 되는 여름 밤의 먼 우렛소리, 혹은 깊은 밤 고달프게 달려가는 기차 바퀴 소리에서와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두려움과 비밀스러움이 있었다.<중국인 거리> 중에서   

  

오정희 작가의 문체 미학이 이런 구절들에 숨어 있다.      

    

한국근대문학관

‘한국근대문학관’은 근대(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에, 근대 시기(1894년~1948년)의 한국문학을 전반적으로 다룬 유일무이한 문학관이다. 여섯 시기로 나눠, 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작품들을 중심으로 전시장을 꾸며 놓았다. 예전 창고를 허물지 않고 잘 리모델링해 활용한 것은 참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광수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작품론

대선배님의 작품론을 들었다.


『난쏘공』을 옴니버스 소설이라 칭한다. 옴니버스라서 좋은 점이 각각을 독립된 작품으로 만들면서,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놀랍게도 조세희 작가는 서울 재개발 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보고 곧바로 문방구에 가서 펜과 노트를 사서 『난쏘공』을 썼다고 한다.   

   

작가는 지금까지도 이 소설이 읽힌다는 걸 슬퍼했다 한다. 재개발 지역의 입주권 관련한 문제는 여전히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오정희 작가의 <중국인 거리>에 나오는 ‘중국인 거리’(지금의 차이나타운)은 청나라 조계지다. 상업활동을 하려는 외세에 의해 억지로 열린 개항지 인천의 청나라, 일본, 그 외 각국 조계지는 쉽게 말해 ‘외국인 거류지’, 치외법권지역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내용은 오정희 작가가 10살 전후 무렵의 기억을 더듬어 소설을 썼지만, 쓰는 동안에 이곳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상력 발휘에 저해가 될까 봐서다. 그렇게 했어도 <중국인 거리>는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완성형의 미학 소설로 남아 있다.          



숲보다 나무를 보다

점심식사 후 해설사의 안내를 받아 중구청을 중심으로 한 인천 문화유산을 둘러보았다. 하늘의 구름은 하얀 뭉게구름, 양털구름이었다. 식후의 느긋함과 나른함을 이 구름이 배가시켜 주었다.     


세월의 더께가 쌓인 어느 골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정말 몇 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일말의 기척도 하지 않았다. 저 정도면 영화 동물 모델 해도 될 것 같다.          


인천 개항박물관(일본제1은행), 대불호텔 등 주변의 근대식 건물들엔 사소하지만 공통된 특징이 하나 있다. 자세히 보면 창가 위턱이나 지붕 언저리에 기다란 꼬챙이가 박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둘기가 앉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똥물 세례’를 받지 않기 위한 조치다.  

        

조금 슬펐다. 문득 덩달아 공원 벤치마다 낮은 높이로 칸막이가 설치돼 있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눕지 못하게 독차지하지 못하게 또는 잠을 자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일 텐데, 벤치에 누워 나무 끝가지와 하늘과 별을 볼 수 없는 세상의 삭막함을 느끼곤 했던 게 기억난 것이다.       

   

이렇게 해설사가 소개하는 건물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쓸데없는 곳만 보았다. 내가 잘하는 짓.


                

맥아더 동상

중구청 주변에서 바라본 인천항은 거리가 한참 된다. 그러나 개항 시기 사진을 보면 수십 척 배들이 지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무척이나 넓은 바다 개펄이 매립된 것이다.

          

<중국인 거리>에 보면 소녀가 맥아더 동상에 올라가 바닷가와 중국인 거리를 보며 그 어린 나이에도 “인생이란……” 하고 답 없는 질문을 혼자 중얼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맥아더 동상은 한 없이 큰 거인이다. 어른도 올라갈 수 없다. 해설사에게 물어보니 1957년 지어진 현재 동상 이전에, 전쟁 후 작게 동상을 지은 적이 있다고 한다. 그곳을 소녀가 장군의 망원경 위치까지 올라간 거고. 소설 읽을 때 들었던 의문이 그제야 풀렸다.           



신포주점

저녁식사 후 모든 일정이 끝났다. 그러나 우리 중 일부는 한 곳을 더 들르기로 했다. 신포동 노포(오래된 가게) 중 하나인 ‘신포주점’이 그곳이다.         


신포동을 향해 자유공원을 넘고 홍예문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높은 나뭇가지 사이마다 하얗고 둥그런 물체가 얹혀 있는 것이 보였다. 까치들이 단체로 잠자는 모습이었다. 몇 십 마리는 족히 되었다. 문득 빙하가 녹아 울상인 북극 펭귄들의 하얀 배가 떠올랐다.          


신포시장을 거쳐 은밀한 구석에 자리 잡은 신포주점에 들렀다. 낙서와 애호가들의 시가 사방 벽지를 뒤덮고 있는, 내가 좋아하는 허름하지만 운치 있는 분위기의 주점이었다. 이곳에 먹은 안주 민어회는 일품이었다. 이렇게 우리 몇몇은 인천 마지막까지 속속들이 유람했다.      

         


꿈과 환상

난장이 아버지가 손가락을 가리키며 천문대 일을 하고 싶어 하던 달의 어제 새벽 모습은 하현 반달이다. 그런 꿈과 환상을 비루한 현실이라는 판에 조각하는 작업이 문학일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그 조각 작품에 손을 대 위안을 받는 것에 그칠지라도 말이다. 조세희 작가는 속도감 있는 단문, 오정희 작가는 머물러 앉아 있는 미문(美文)이라는 조각칼을 사용했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 인천기행이 가져다준 몽상.      


덧붙이는 말)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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