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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독한 사랑에 감동한다

- 개츠비와 히드클리프의 사랑

by 밤과 꿈

간혹 사랑과 집착이 헷갈릴 때가 있다. 이성에 대한 감정으로 사랑이 깊어지면 사랑은 집착의 늪에 갇혀 헤매게 될 수도 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은 사랑에 대한 경험 부족에서 오는 오류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비록 힘들고 고단할지라도 식지 않는 사랑의 감정을 추력으로 견디고 자신의 사랑을 유지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단단히 콩깍지가 씌었다고 생각되더라도 당시자의 마음은 진지하다. 비록 행동에는 거리가 있어도 그 마음까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경험이 부족해 사랑에 서툴 따름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대부분 이루어지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될 쓰라린 실패담만 남는다. 그리고 쓰라린 실패담의 대부분은 사랑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자책감으로 채워진다. 우리 모두가 이루어진 사랑보다는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옛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는 사랑 이야기에 감동하는 까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면서도 끝난 사랑이라는 현실을 수긍하고 살아간다. 현실과 달리 소설에서나 가능할 법한 끝내 잊지 못하는, 집요한 사랑을 사랑에 대한 헌신이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그 사랑이 집착으로 귀착되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일지라도 감히 헌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신을 내던질 만큼 사랑에 헌신적이지 못하고 우리의 사랑이 언제나 미완성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의 이야기라면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가 쓴 소설 '위대한 개츠비'가 먼저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이 소설을 물질주의가 팽배한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단순하게 이해하기도 하지만 데이지와 개츠비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과 개츠비의 희생 또한 이 소설의 주요 주제의 한 축을 이룬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소설은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조건들이 결합되어 있으며 그 점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한다. 데이지와 개츠비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요인은 상류층과 하층민이라는 신분의 차이다. 말하자면 물질에 의해 좌절하는 이상(소설에서는 사랑이 되겠다)을 그리며 물질주의가 팽배해진 미국 사회를 비판한다. 나아가 금주령이 내려진 1920년대의 미국에서 밀주판매업으로 성공한 신흥 부자 개츠비와 전통적인 상류층에 속한 데이지와 톰의 갈등과 개츠비의 죽음을 통해 물질주의의 범람 속에서 붕괴되는 미국의 꿈, 아메리칸드림의 실상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대주제의 이면에 슬프고도 외로운 개츠비의 사랑이 더하고 있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개츠비의 사랑은 미국의 잃어버린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피츠제럴드는 닉에 의해 전달되는 작가의 시점을 통해 미국이 되살려야 할 가치관의 회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콧 피츠제럴드(1896~1940), 가족과 함께


또 하나의 소설, 에밀리 브론테가 쓴 '폭풍의 언덕'에서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랑의 예를 만나게 된다. 히드클리프와 캐서린 언쇼의 집요한 사랑, 제목만큼이나 휘몰아치는 광기에 찬 사랑의 이야기를 나는 청소년기에 읽었다. 아직 사랑을 제대로 모를 때 읽었던 이 소설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질풍노도의 시절을 지나고 있어서 이 소설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사랑이 깊이보다는 본능적이라는 사실과 막장이라고 할 만큼 얽히고설킨 사랑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접근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가히 악마적이라고 할 히드클리프의 집착에 의한 사랑, 그것을 정상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을 일컬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허먼 멜빌의 '모비 딕'과 함께 영문학 사상 3대 비극이라고 할 정도로 강렬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 점이 이 소설을 불멸의 고전으로 만든다. 이처럼 소설의 가치는 영원하지만 히드클리프의 광적인 사랑을 영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히드클리프의 사랑에 숭고하다는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왠지 영원은 숭고라는 개념과 연결되어야 할 것 같다. 차라리 히드클리프의 사랑에 어울리는 말은 지독한 사랑이 아닐까.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개츠비의 사랑도 지독한 사랑이라고 할 만하다. 사랑하기에 자신의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실행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생명처럼 소중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에밀리 브론테(1818~1848)의 초상


결국 우리는 지독한 사랑에 감동한다. '위대한 개츠비'나 '폭풍의 언덕'이 가진 상상력과 뛰어난 문학성이 이 소설들을 고전으로 만든 것이지만 소설의 근간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지독한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모하지만 지독한 사랑에 공감하고 감동한다. 비록 그 사랑이 슬프고 아픈 것일지라도 우리 모두가 어설프서 슬프고 아픈 사랑(예를 들면 첫사랑과 같은)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어 감동하는 것이다. 지독하지만 그 사랑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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