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조선의 왕실에서는 왕의 맏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이 있었다. 조선의 3대 왕이었던 태종 역시 그러한 전통을 받들어 장자인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는데 정작 양녕대군 본인은 성인이 되면서 왕이 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기 시작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여자뿐이었다.
양녕대군이 얼마나 여자를 좋아했냐면 남편이 있는 여자와 간통을 하는 것도 모자라 신성한 왕실에 궁궐 밖 기생을 첩으로 들이기까지 했다. 태종이 여자 문제로 여러 번 혼을 냈으나 "아빠도 여자 밝히면서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라는 식의 대응으로 안 그래도 열받은 태종의 화를 더 돋우었다고 한다.
나랏일엔 관심도 없고 여색만 즐기는 양녕대군을 보고 태종은 장남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계획을 바꾸었다. 대신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셋째 아들 충녕대군에게 왕의 자리를 넘겨주는데 형을 대신해 조선의 왕이 된 충녕대군이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존경하는 세종대왕이다.
만약 태종이 양녕대군에 대한 믿음을 져버리지 않고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면 과연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여자만 밝히는 카사노바 전하 때문에 왕권은 약화되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조선의 재정은 바닥이 났을 것이다. 허나 이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바로 우리의 언어인 '한글' 역시 탄생하지 못했을 거란 것이다. 우리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에게만 감사를 표하지만 망나니 양녕대군에게 왕권을 물려주지 않고 세종대왕에게 왕위를 계승한 태종에게도 왠지 모르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셋째 아들로 왕이 된 세종대왕은 자신의 뒤를 이을 왕은 조선의 전통에 따라 무조건 첫째 아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찍이 맏아들이었던 향을 세자로 책봉, 양녕대군과 같은 망나니로 키우지 않기 위해 자식 교육에 온 정성을 다했다. 다행히 세자 역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며 똑똑하고 착한 아들로 자라났는데 생각지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며느리였다.
세종은 재위 시절, 세자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명문가의 딸, 휘빈 김씨를 세자빈으로 들인다. 하지만 세자는 아버지가 골라주신 아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좀처럼 세자빈의 침소를 찾지 않았다. 독수공방 매일 홀로 밤을 지새웠던 휘빈 김씨는 세자를 끌어들일 모략으로 궁궐에 떠도는 미신에 현혹되기에 이른다. 세자의 방을 드나드는 궁녀의 신발을 불에 태워, 그 잿가루를 세자의 찻잔에 몰래 탄다든지 두 뱀이 교미할 때 흘린 정기를 닦아낸 수건까지 몸에 차고 다니며 세자의 사랑을 애원하고 갈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휘빈 김씨의 행동은 세자의 사랑을 쟁취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왔다. 궁궐 안에 휘빈 김씨의 이상한 행동에 대한 소문이 퍼지고 퍼져 시아버지인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간 것이다. 세종은 휘빈 김씨가 세자를 상대로 각종 비방을 쓴다는 사실을듣게 되자마자 며느리를 궁에서 쫓아낸다. 그리고 아들에게 순빈 봉씨라는 새로운 아내감을 구해주는데 이번에도 세자는 아버지가 골라준 아내를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 탓에 순빈 봉씨 역시 휘빈 김씨처럼 독수공방 매일 홀로 밤을 보내는 처지가 되어버렸는데 너무나도 외로웠던 나머지 순빈 봉씨는 첫째 며느리인 휘빈 김씨보다 더 엽기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궁 안의 시녀들을 통해 정신적, 육체적 공허함을 채우고자 한 것이다. 그중에서도 순빈 봉씨는 소쌍이라는 시녀와 제일 가까웠는데 급기야 두 사람은 궁 안에서 동성애 행각을 벌이다 발각되고 만다.
보수적인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그것도 장차 임금의 아내가 될 세자빈이 동성애를 즐겼다는 사실은 지금 들어도 놀랍지만 그때 당시로 봤을 때도 순빈 봉씨의 행동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아주 추악한 스캔들이었다.
결국 순빈 봉씨 역시 휘빈 김씨처럼 세종대왕에 의해 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막상 며느리를 내쫓고 보니 세종은 아들의 대를 이를 후사문제가 걱정이 되었다. 이때 이조판서 허조가 양가의 딸을 세자궁에 들이라고 세종에게 조언했고 허조의 권유를 받아들인 세종은 후궁간택을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 세자는 권씨, 정씨, 홍씨라는 3명의 후궁을 갖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맺어준 짝에게 그간 사랑을 주지 않았던 세자는 그래도 그 중에 권씨, 홍씨는 마음에 들었는지 사랑도 듬뿍 주고 침소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홍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자식을 낳지 못하였고 권씨만 1남 2녀를 출생했는데 마지막에 낳은 자녀가 훗날 조선의 6대 왕이된 단종이다.
앞서 궁궐에서 쫓겨난 골칫덩이 며느리들을 비롯해 아들의 대를 이을 후사 문세로 골머리를 앓던 세종대왕은 세자의 나이가 서른이 거의 다 돼서야 손주를 얻게 되어 무척이나 기뻤다. 얼마나 좋았던지 손주의 탄생을 기념해 대역 죄인을 제외한 모든 죄인은 사면하라는 특별 명령까지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며느리인 양원 권씨가 출산한지 이틀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 때문에 충격이 컸던 걸까? 세자는 양원 권씨가 죽은 이후, 따로 왕비를 두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의 짝을 찾아주고 대를 잇고자 두 번이나 며느리를 갈아치운 세종 역시 원손을 낳은 세자빈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문종의 뜻에 따라 며느리를 들이지 않았다. 이로써 며느리를 쫓아낸 세종대왕의 이야기는 끝이 날 것도 같으나 아직 이야기가 더 남아있다. 세종대왕이 넷째 아들이었던 임영대군의 처, 남씨와 여덟째 아들인 영응대군 처, 송씨까지 몰아냈던 것이다.
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남씨가 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눈빛이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내쫓았고 송씨는 몸이 약해 쫓겨났다고 한다. 사실 이렇게 보면 세종대왕이 유독 며느리 복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한데 사실 휘빈 김씨와 순빈 봉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해 비방을 쓰고, 동성애를 즐긴 것이니 단순히 며느리만 탓할 게 아니라 아내에게 사랑을 주지 않은 세자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오줌을 못 가리고 이상한 눈빛 때문에 쫓겨난 남씨는 그때 당시 12살에 불과했으니 세종대왕이 아량을 조금만 더 베풀었다면 훌륭한 며느리가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프다는 이유로 쫓겨난 며느리, 송씨는 궁을 떠난 이후에도 영응대군과 몰래 만나 딸을 두 명이나 낳았다고 하니 실제로는 아파서 쫓겨난 게 아니라 그저 세종대왕의 미움을 사거나 일시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것을 세종대왕이 일을 크게 만들어 내쫓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내 개인적인 추측이기 때문에 이 글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해군이 현 시대에 들어와 폭군이라는 오명을 버린 것처럼 역사란 시대에 따라, 그리고 누가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인물에 대한 평가는 얼마든지 엇갈리고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세종대왕이 과거와 현대를 통틀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하고 뛰어난 업적을 가진 지도자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지만 며느리 입장에서 봤을 땐 솔직히 그렇게 좋은 시아버지는 아니었다고 평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