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의 마지막 시간

병실에서 보낸 2주간의 기억

by j 줴이

아빠와 함께 보낸 병실에서의 마지막 2주는 먹먹하고도 목메는, 감히 설명할 수 없는 묵묵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분명 그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던 가치 있는 시간들이었다. 시답잖은 내용이더라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조곤조곤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시간은 분명 재미있고 의미 있는 일이었다.

병원에 입원하기로 결정한 그날부터 아빠의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한 2주 동안 감히 지옥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언저리에 서있는 기분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내 몸의 피는 멈춰있다가 곧 반대방향으로 흐르기를 반복하는 것 같았으며 심장이, 마음이, 내 뇌가 감지하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들은 단순히 희로애락 중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과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우리는 응급의 상황에서 더할 나위 없이 초조했지만 안정된 시간 안에선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첫 병실에서 다른 층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을 때 겨우 적응된 며칠의 시간이 아쉬워 마음이 불편했으나 자리를 옮기고 난 뒤 다시 볼 수 없을 병실 창 밖의 경이로운 풍경들을 그곳에서 감상하고 나니 첫 병실에서의 시간마저 전부 물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서로를 마주한 일이 있었을까? 1인 침대와 그 옆에 나란히 놓인 보조 침대에서 사라져 가는 아빠의 시간을 삼켰다. 어느새 병실에서의 시간은 일상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 있었고,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 평화로운 시기가 찾아오면 순서 상관없이 누구라도 곯아떨어졌다. 옆 침상이 비어 한동안 남의 구역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었을 땐 내심 신나기도 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우리는 복작거리면서 때론 카운트 다운되고 있는 시간을 망각한 채 일상의 시간을 보내듯 병원의 시간을 보냈다.

병원에서의 생활은 불특정 다수와 함께해야 한다는 불편함을 기점으로 모든 주체가 환자이고, 방문한 모든 이들이 슬픔을 껴안고 있으며, 회백색의 공간은 이 모든 상황들을 냉랭히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분명히 힘겨운 생활이었다. 그래도 이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앞 침대와 옆 침대는 앞 집이 되고 옆 집의 이웃이 된다. 각자의 사연을 품에 안고 각자의 침대에서 각자의 시간을 따로 또 같이 보낸다.



병원 생활에서 슬픔을 감당해야 하는 것 다음으로 힘들었던 것은 먹고 자고 싸는 일 중에 잘 못싸는 일이었다. 나는 심기나 환경이 불편하면 까탈스럽게 구는 예민한 대장을 갖고 있다. 반면 오빠는 건강한 장을 타고났는데 거리낌 없이 제때 신호를 받고 바로 신호에 반응하는 쿨한 인간이다. 오빠는 6인실에 딸려 있는 화장실은 아무래도 불편하다며 다른 층의 공용화장실을 사용했는데 하루는 모닝 똥을 위해 채비를 하던 그가 병실을 나섰다 다시 들어오는 게 아닌가. 왜 안 가고 다시 왔냐 물으니 지금 내려가면 아무래도 떠오르는 저 태양을 놓칠 것 같다며 황금 같은 모닝 똥의 시간을 병실 창 밖의 지글거리는 일출에 양보했다. 그렇게 우리는 슬프고도 먹먹한 공간에서 조금은 웃기게 황금 같은 일출의 시간을 함께 하기도 했다.

모두가 잠든 밤, 수십 번의 호출에도 당직 의사의 답변이 없어 마지막인 듯 아닌듯한 숨으로 밤새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을 겨우 보내고나면 다음 날 모르핀으로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빠가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 모든 양면의 시간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안내하고 있었다. 평화롭게 잠든 아빠를 곁에 두고 오빠와 좁은 보조 침대에 나란히 앉아 썸남에 관해 이야기하던 시간, 어느 날 시간에 관한 신문 기사글을 읽고 아빠에게 던진 질문, 박완서 선생이 딸의 죽음을 대면하며 내뱉었던 문장 등 나는 그 좁은 공간에서 정체되어있는 듯 보였지만 분명한 어떤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빠는 내 썸남 이야기를 전부 듣고 있었을 것이고, 신문기사를 빌미로 우리는 시간에 관한 철학적 사유를 시답지 않게 나눌 수 있었으며, 죽음을 대하는 타인의 태도를 통해 나는 다가올 죽음 앞에서 조금 담대한 척할 수 있었다.

그때 알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의 문제에서 아빠와의 시간, 오빠와의 시간, 나의 시간, 그리고 우리의 시간이 결정되고 있었다.

아빠를 객체로써 바라보지 못한 지난 시간들이 안타깝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그저 하나의 객체일 뿐이었다. 아빠와 함께한 병실에서의 마지막 2주는 힘겨웠지만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고 이야기 나눴으며 웃고 울었다. 그제야 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오빠, 누군가의 아들, 그리고 누군가의 남편이었던 한 사람의 인생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그 인생의 극히 일부분 중 마지막 눈동자를 나눌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그때의 희로애락 그 너머의 감정을 짊어지고 나는 지금의 현재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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