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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단 Oct 16. 2024

도달할 수밖에 없는 주제

소설가에게 '주제'란

글의 첫 운을 띄우는 것은 어렵다. 일기장의 첫 페이지에는 항상 솔직하지 못한 자신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정교한 한 문장을 쓰는 것보다 아무런 문장으로 주사위를 던지는 것을 선호한다. 배의 닻을 끌어올리고 나면 원래의 주제로 알아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고자 마음을 먹었을 때도 똑같았다. 너무 잘 쓰고 싶었기에 써 내려갈 수 없었다. 첫 장부터 내가 시사하고 싶은 주제에 완벽히 행렬을 맞춰 완벽한 의미를 지니길 바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 글은 포기했다.


글을 쓰는 연습-쓴다기보다 손가락을 끊임없이 이어나갈 수 있는 연습-을 하고자 아무런 글을 쓰고자 마음먹었다. 독특함 하나 없이 모두가 사용하는 클리셰 범벅인 세계관 사이에 챗gpt에서 대충 설정한 인물들을 던져두는 것이다. 아마 주변에 이런 글을 쓴다고 밝히면 나는 창피해서 죽을지도 몰랐다. 나만의 독특한 설정을 가지고 싶은 것은 작가의 자존심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어쨌든 글을 쉽게 쓰고자 하는 마음으로 유치한 스토리와 유치한 문장, 유치한 인물들을 얽혀 어디를 향하는지를 머릿속에 던져두었다. 그리고 나는 멀리서 그저 바라보았다.


던져둔 세계가 하나의 결말로 도착했을 때, 나는 그것을 글로 쓰고 싶어졌다. 아니, 그건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가 쓰려다 포기한 글과 같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감명받아왔던 책, 영화, 애니, 영상과도 같았다. 어쩌면 내가 고집하는 원칙과 신념의 원초, 그리고 청사진을 담기도 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철가루가 자석에 들러붙듯, 불규칙한 모래가 음의 파동에 흔들려 규칙적인 문양을 만들듯, 작가가 반드시 도달하게 되는 '주제'란 무엇인가.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반드시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것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어쩌면 내가 장르소설이나 순수문학을 100편을 쓰더라도, 혹은 그림이나 음악을 하더라도, 그 무엇도 없이 그저 삶을 영위하더라도, 모든 건 결국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주제라고 하면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나라의 광복을, 누군가는 식민지의 정당화를, 누군가는 자유를, 누군가는 굳건한 자본을 찬양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익 혹은 옳음의 대립으로 증오가 반복된 역사를 가진 인류에 속한 이상, 이를 벗어난다는 말은 상당히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 사상은 '주제'가 표현되는 하나의 표현 방식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나의 주제는 '공포'로부터 시작된다. 역사를 통해 증오를 배웠고, 심리학을 통해 본성을 배웠고, 철학을 통해 올바름의 그늘을 배웠고, 인문학을 통해 모순을 배웠다. 나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공포'를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줄곧 공포 영화를 무섭다면서 계속 찾아보는 친구들을 심리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드디어 이해할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가 압도되어 무력함 그 자체에 놓이는, 그럼으로써 살아 있음을 느끼는.


공포 속에서 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인류의 부정함 속에 속해있음을 알았을 때, 이해하지 못했던 잔혹한 역사들이 나의 본성에서도 꿈틀거림을 알았을 때, 내 도덕관과 이기심은 철저히 모순되어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그 무엇보다 적절한 인간으로 '생존'하고 싶은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생존인가? 숨이 붙어있고 그다음 생존을 위해 움직일 수 있다면 무엇이 생존과 가장 가까운가? 이 복잡한 흐름 속에서 나약하기만 한 내가 찾을 수 있는 절대적인 생존방법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나는 찾았고, 찾음으로써 단순해졌다. 비슷한 결론을 내린 사람을 보고 확신을 얻는다. 그 이후로 나뿐만 아니라 내가 창조한 모든 것들이 하나의 답으로 향하는 것 같다. 가끔씩 내가 찾은 답을 까먹고는 방황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최종 목적지로 가는 방향을 안다는 것은 멈춤조차 편안하게 느껴지게 해 준다.


'너 따위가 어떻게 그런 대단한 질문에 답을 내려?'라는 질문에 답하기 전 내가 진심으로 감명을 받았던 무언가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마음을 울리고 쓰라리게 하고 변화시키고 단단히 굳혔던 아주 잔인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짧은 예를 들면, 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좋아했다. 나는 그가 생애 쓴 모든 글을 읽었다. 나에겐 그의 글을 모두 모아둔 전집이 있으며 난해한 문장 하나하나의 의도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대답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반해버린 '변신'의 동화버전을 가장 좋아했고 그것이 오히려 나의 '주제'와 가까울 것이다. 나는 그의 '글' 좋아하기보단 잔혹한 현실을 인지하였음에도 주제에 도달하고자 한 '그'를 좋아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프란츠 카프카와 같다. 이후 그의 단편집을 읽기는 했지만 금세 손을 놓았다. 밀란 쿤데라는 맞다. 사회적 배경을 온전히 알지 못하고 큰 줄기밖에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그의 단편을 통해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즐거웠다. 내가 봤던 만화 중 도쿄구울은 엇비슷하다. 작품보다 작가를 분석했다. 강철의 연금술사, 진격의 거인은 맞다. 작품 곳곳에 숨겨진 장치 속에서 감동을 받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책이지만 작가를 굳이 찾아보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나열하지만 나는 역시 영화나 책, 애니에 대한 리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어떤 작품들은 며칠 내내 열병에 들게 했고 이에 대해 쏟아낼 수 있는 말들이 많지만 나만의 온전한 감상을 이성이라는 망치로 깨트릴 자신은 없다.


이보다는 개인적이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나의 근원에 대해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싶다. 나의 삶을 관통한 후 굳어져 10년 전의 나나 10년 후의 나조차도 똑같이 말을 내뱉을 것 같은 것들 말이다. 무한히 찍어내는 도장이자 가슴에 새겨진 주홍글씨들. 유치하며 어린것들, 그럼에도 손에 꼭 쥐고 놓지 않고 있는 것들.


머릿속으로 여러 소재가 떠오르지만 이를 글로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왜곡과 자기 방어가 흐름을 막을 것 같다. 너무 솔직한 순간은 지워버리기도 하겠지. 내담자와의 긴 상담이 시작됐다. 이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서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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