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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단 Oct 30. 2024

얼렸던 봄을 녹이는 법

좋은 것들을 지나가는 법

인간을 이루는 근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집'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전에, 공간은 앞서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가장 깊게 스며들어 '나'라는 양식(樣式)을 만들어낸다.


우리 집은 문화재였다. 오고가는 여행객 하나 없는. 그러나 사계절 내내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밤에는 어둠이 지켜주고, 매년 꽃과 풀들이 계절의 시작을 알려주는 곳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마당과 산과 호수에 사는 것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 그 무엇도 누군가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독립적이며 어우러지고 공생했다.


5년 만에 찾아가 본 옛날 집. 지금은 아무도 없다.


민들레는 봄이 되면 꼭 마당에 찾아왔다.


엄마가 "저기 가서 민들레씨랑 놀아."라고 하면 솜털이 동그라미를 만들던 민들레에게 가서 "민들레씨, 안녕?"하고 말을 붙였다.


그때쯤의 나는 민들레씨의 '씨'를 씨앗이 아닌 '000 씨'하며 어른들이 쓰는 호칭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 시간 내내 조잘조잘 거리며 혼자 잘 놀았다고 한다. 나는 내 친구들(풀과 나무들)이 활발히 떠들다가 내가 나타나면 안 그런 척 숨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마치 토이스토리처럼 말이다.


이탓인지 나는 '친구들과 어울린다'는 개념을 또래에 비해 한참 늦게 깨닫기도 했다.




봄은 추운 땅이 녹고 초록색도 덜 입은 것들이 허겁지겁 뛰어오는 시기다. 엄마 손에 끌려 산속을 오다녀야했기에 그때의 나에게는 너무나 귀찮고 분주한 계절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봄을 마냥 달가워하지는 않았다.


"엄마가 오늘 뭐 찾았게~"


달래가 피어난 곳을 찾은 엄마는 보물을 발견한 것 마냥 신나서 나에게 자랑했다. 엄마는 누가 캐갈까봐 조마조마해하며, 주변 풀로 덮어 숨겼다고 했다. 이 외에도 엄마는 매년 내가 이름도 기억 못 하는 풀들을 찾아서 자랑했다. 꽃과 약초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집 주변의 식물들을 알아보곤 하셨다. 막상 내가 보면 그냥 풀인데도 말이다.


을 캐는 것은 봄의 연례행사였다. 쑥이 정말 많이 오래 내버려두면 억세기 때문에 조금 추위가 있을 때, 부드러운 아기 쑥들을 캐서 바구니에 담았다. 나는 쑥떡은 좋아했지만 쑥국은 좋아하지 않았고, 엄마는 매번 쑥국을 만들었다. 나는 쑥국이 싫었기 때문에 항상 뾰로통한 표정으로 쑥을 캤다. 그런데도 열심히 캐서 항상 바구니는 꽉 차있었다.


죽순캐기도 했다. 사방이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였기에 흔했다. 옥수수 껍질 까듯 대나무 껍질을 벗겨내 한 입 베어무는 아빠를 야만인처럼 바라봤다. 나도 한 입 먹었는데 엄청 부드럽지만 이상한 질감이었다. 애기 죽순을 다 캐면 대나무 숲이 사라질 것 같아 걱정하곤 했다.


어릴 때 편식이 심했는데 우리 집에서 난 것들은 싫다고 하지 않았다. 산나물뿐만 아니라 텃밭에서 키우던 상추, 가지, 오이, 방울토마토, 호박잎 등등 나열하면 끝도 없다. 왠지 모르게 집의 것들은 좋았다. 좋다기보단 맛없다고 하면 풀들에게 욕하는 것 같아 싫어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급식에 나온 채소를 다 버리며 우리 집에서 난 채소밖에 안 먹는다고 친구들에게 으스대곤 했으니까... 신난 얼굴로 요리한 엄마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이유가 어쨌든 맛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싫은 내색 없이 곧잘 먹었다. 그래서 지금도 뭘 먹든 살 안 찌고 건강한가?




"봄이 지나가는 게 아쉽지 않아?"


더위가 찾아오기 시작한 봄의 끝자락 즈음, 엄마가 물었다. 나는 설렘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유도하는 엄마의 질문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봄을 얼려놨지."


엄마는 냉동실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병 안에는 동글동글하고 하얀 구슬들이 담겨있었다.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담아 건네고 그 구슬을 하나 둘 떨궜다.


자그마한 매화의 봉오리였다. 따뜻한 물 위에서 꽃봉오리가 펼쳐지고 매화 향기가 가득 퍼졌다. 따뜻한 물은 꽃의 꿀맛이 조금 맴돌기도 했다.


산길 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매화나무는 살구나무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꽃이 안 피는 시기에는 항상 어떤 나무인지 헷갈렸다. 항상 추위가 가시기 전에 피어서 자주 나가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내가 보고 싶을 때, 내가 편한 집 안에서 볼 수 있도록 매화의 봉오리를 모두 따 냉동실에 넣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매화가 제때 피는 것만큼 소중한 것은 없기에 아쉽게도 여운만 느낄 수 있을 정도만 봉오리를 따서 유리병에 넣었다. 따지 않고 넘어간 해도 많았다.


나는 매화나무를 잘 모르고 자주 찾지도 않았지만 아꼈고 그리워했다. 지나가는 모든 좋았던 것들에 대해서 그렇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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