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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진 Jul 06. 2024

의존성 우울증

밉지 않은 우울자가 되자

근 3년 동안 푸름을 앓으면서

은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느껴온 것들이 모래사장의 모래알처럼 많지만

서둘러 하나를 말해보자면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한가?



우울의 섬


물론 그렇다고 선호하는 사람의 유형에 대한 필승법칙은 없다.


정말로 사람들은 정말 사람이라서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라는 말이 요지경 세상에 꼭 필요한 말로서 자리 잡은 것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의 유형이라고 하는 것도 제각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언(定言)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우울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물론 그건 우울한 은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많은 우울에 대한 칼럼에서는

우울증엔 사람이, 관심이, 도움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간혹 자살의 원인을 주변인들의 무관심으로 돌리기도 한다.


억지로


은재는 그것들을 생각하며 "억지로"라는 부사가 떠올랐다.

억지로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다고.


우울자들에게 기울어진 마음을 쏟는 것은

구멍 난 항아리에 물을 채우는 것과 같아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1. 우울자가 그들에게 애원하거나

2. 비우울자가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할 테다.

그리고 상상해보건데 우울자가 비우울자가 되거나

비우울자가 우울자가 되지 않는 이상 그 결과는 둘 중 하나의 희생으로 가득 차지 않을까?


그럼 우리(푸름을 앓는 사람들)가 사랑스러운 우울증 환자되면 괜찮을까?


사랑스러운

우울증 환자.


은재는 그 句가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내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사랑스러운 우울증 환자가 될 수만 있다면 되고 싶을 정도로

은재의 푸름은 불행히도 사람을 쫓았다는 것이었다.



NANA...



은재는 동굴에 들어가야 할 때가 되면 누구 하나라도 함께 들어가고자 했다.

그게 애인이어도 상관 없었고

친구여도 상관 없었고

모르는 사람이어도 상관 없었다.

(다만 가족은 불편했다)


함께 동굴에 들어가 나는 슬퍼하고 너는 나를 돌보길 바랐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


왜냐하면

우울증이 없는 사람은,

푸름이 없는 사람은 일상을 살아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그리고 은재는 그 과정에서 사랑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함께 동굴 근처라도 가주었던 사람들은 줄곧

은재를 사랑한다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래서 은재는 사랑이 없는 친구보다도 남자(은재는 이성애자다)를 찾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은재에게 자주 이런 상황이 있었다.

상대가 일회성 만남의 그대이거나

군대나 기숙 학교, 이사와 같이 단절이 일어나거나

직장인이거나.


하루 24시간을 동굴에서만 있는 은재에게 이렇다 할 그들의 상황은 불편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전화기를 붙들고 울었다.

화를 낼 때도 있었고,

화를 못 이겨 욕을 할 때도 있었고,

돌연 길길 빌 때도 있었다.


그러다 은재의 마음에 빈자리가 생겨 뒤숭숭해지면

은재는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사람들을 바꿔치웠다.


상대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난 적도 있었다.

친구인 남자애를 불건전하게 대한 적도 있었다.

은재의 그런 모습에 친구 몇 명은 남자에 미친 X라며 절교를 하기도 했다.

회상해보면 그때 은재는 떠나간 친구들이 아쉽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자신 곁에 언제나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은재에겐 그게 중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사람 사이의 예의라는 것이 감정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예의에서 어긋나 버리면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절대 되돌릴 수 없다고 은재는 경험했으니까.

그래서 이젠 그런 애송이 같은 짓은 하지 않는다.


은재는 노트를 펼쳐놓고 한 손으로 볼펜을 돌리며

푸름 속에서 자신이 잡았던 손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펜을 들고 노트에 적어내려갔다.

(이후의 내용은 백퍼센트 사설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주변에 사람들이 손을 내밀면 그 사람을 주저앉히는 경향이 있다.

주저앉혀서 함께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그 이야기에는 서두가 없으며 결론도 없다.

왜냐하면 우울한 사람들

푸름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결국 그들의 정확한 감정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자신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해결책이란 무의미하다.

나는 결국 자신에게 해결책을 주었던 사람들이

그 해결책을 이행하지 않는 나에게 지쳐서 어디론가 가버렸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나는 의지박약으로 기억될 것이다.

단순히 그 해결책들이 나에게 와닿지 않았을 뿐인데도.


다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공감만 하라는 것도 아니다.

이건 너무 고역이라는 것을 푸름을 가진 우리도 알고 있다.


차라리 수화기를 책상에 내려두고 손톱을 다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언제나 네 옆에 있을 것이란 믿음(그러니까 그럼에도 전화를 받는 수고로움)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네가 슬퍼도, 아파도, 우울해도 
네 옆에 있을게.
절대 떠나지 않아.
기다릴게.


물론 사람마다 이 푸름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무조건적인 사랑

누군가는 비난이나 충고

누군가는 동행

누군가는 재력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푸름이 다른 것들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불가사이하고,

역설적이고,

 비정상적이게도,

푸름엔 사람이 필요하다.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순환하는 생명력을 가진 무인도처럼

스스로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리고 은재는 볼펜을 내려놓고

이 세상 모든 푸름에게 말하고 싶었다.


사랑스러운 우울자가 될 수 없다면

밉지 않은 우울자라도 되자, 고.


결국 우린 다시 이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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