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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유진 Oct 12. 2024

또 다시 가을

우리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올해는 입추가 지나도

날이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한 차례 비가 오더니

겨우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이제 가을이야.


사람들이 그렇게 반가운 마음으로 수군거리는 것이

은재는 온 마음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실로 사실이었다.

바깥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짙어졌으니까.


그래,

이제 정말 가을이야.


은재도 그 분위기와,

그 소리에 맞춰

반가운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출처 : 핀터레스트



그리고

은재에게 가을은 금목서의 계절이다.


은재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우리나라 남쪽에서만 자라는 금목서가 있다.

그리고

은재가 자주 가는 시골 카페에도

금목서가 있다.


은재는 금목서가 피는 가을을

금목서가 핀다는 이유로 좋아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이 남쪽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은재가 줄곧 이렇게 계절에 대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었다.

계절에 피는 식물에 대해 관심이 없었을 때,

은재는 계절에 대해

솔직히 말하면 기쁨보다는 걱정,

걱정보다는 해탈의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 덧없이 가는 시간들을

내가 잡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해탈이었다.


우리는 시간을 잡지 못한다.


그리고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더군다나

나이가 들수록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그것은 어쩌면 사실이다.


그 사실 속에서 은재는 바스라졌다.


그러다 어느 여름,

이런 다큐멘터리를 봤다.


EBS 다큐프라임의 다큐멘터리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유심히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데,

제목만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그만큼 그 제목에 꽂혔고,

그래서

SNS에 그 제목을 사진을 찍어서 게시글로 올렸다.


그때 당시 은재는 자신의 감정을 거리낌 없이

하나도 여과하지 않고 올렸는데,

가끔은 폭력적이고

대체로 부담스러워서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 은재의 게시글에 무반응이었다.


그래서 은재는 그 날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게시글을 올렸는데

고등학생 때 같은 반이던 친구에게

메시지가 왔다.


장문의 메시지였는데,

마지막 문장이 이랬다.


우린 무사히 할머니가 될 거야.


친구의 그 말에 은재는 순식간에 울었으나

울었던 이유가

그런 말이 고마워서가 아니라

(물론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불가능한 것에 대한 기대가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은재의 오랜 꿈은 요절이었다.


정확한 목표 나이는 없었지만

늙지 않은 채 죽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다.


이유를 굳이 꼽자면,

두 가지다.


첫 번째

은재는 늙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은재는 늙는 것이 싫었다.

자신의 늙음은 전혀 우아하지 않을 것이며

늙어서 무뎌지고, 그래서 무례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될 바엔 일찍 죽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

은재는 크게 삶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공부를 꽤나 잘 했던 학생이었으면서

그래서 대학이라는 목표가 있었으면서도

오늘 죽어도 딱히 아쉬움이나 설움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알 수 없다.

타고난 우울 때문일까?

이런 생각을 오래 갖고 있게 된 이유는

은재야 말로 궁금하다.


아무튼

이 두 가지 이유로 은재는 늙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할머니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거라니.


은재는 펑펑 울고

일단 그 친구에 고맙다는 답장을 하고나서

아주 오랫도록 그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런가요?


누군가 이 회차를 보고 은재에게 묻는다면

은재는

아주 빠르게,

하지만 진심을 다해서

전혀 그렇지 않진 않아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은재는 여전히 늙는 게 두렵고,

지금 죽는다고 크게 아쉬울 것은 없다.


그리고

목표로 삼는 나이도 여전히 없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이미 지났다.


그럼에도 은재가 늙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유는


은재에게는 사랑이 있으니까.


일단은 은재의 고양이들.

이 두 놈들이 발을 붙이고 살아있는 한 은재는 살 것이다.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주인으로서,

동반으로서의 책임의식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아이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은재 자신이었다.

이 아이들이 남아있는데,

은재가 죽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은재에게는 지금 반려자로 함께할 사람이 있다.

물론

늘 그 사람에게 은재가

당신보다 하루라도 먼저 죽을 것이라 말하지만

함께 늙어보고도 싶은 마음이 생겼다.

당신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싶다는 마음이.

이전 연애에선 그렇지 않았다.

이전에는 반려자라고도 쉽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그냥 뜬구름처럼 생각했으니까.

(물론 그땐 결혼의 전선에 가깝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사랑.

그럴 땐 사랑.


세상은 사랑으로 돌아간다는 은재의 믿음과 같이

사랑이 중요하다.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은재는 이 글을 쓰면서

할머니가 되어

이런 가을에 대추차를 마시는 상상을 한다.


어쩌면 두 아이들을 모두 무지개 나라로 보내고

동네의 길고양이들을 기르며

동반자와 함께 나란히 서서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어쩌면 빨간 원피스를 입고서.


그리고

그땐 아프지 않기를.


모든 약을 끊어도

멀쩡히 생활하고 잠을 자기를.


은재는

어엿이

그런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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