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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그루 Sep 16. 2021

당신은 무엇에 푹 빠져 있나요?

<수학에 빠진 아이>, 미겔 탕코 그림책, 김세실 옮김

아빠는 결혼 전에 엄마에게 했던 많은 약속들을 지키지 못했다. 엄마는 그것을 두고 ‘사기당했다’는 표현을 할 만큼 억울해했고 마음의 병을 키웠다. 아빠는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엄마를 속이고 결혼한 나쁜 남자가 되어 버렸고 부부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지금에야 이렇게 관찰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옛날 그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을 어릴 때의 나를 생각하면 슬픈 연민의 감정이 느껴진다.

엄마는 자연스레 남편보다 아이들에게 기대를 걸었다. 공부 잘하고 예쁘고 똑똑하게 키우고 싶었을 것이고 그것으로 위로와 보상을 받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이가 되지 못했다.


아직도 상처로 남아 있는 목소리가 있다.

괜찮다가도 소리 없이 스며드는 아픈 목소리다.

엄마의 짜증 섞인 한숨이 내 깊은 곳에 가시처럼 박혀서 의식을 하는 순간 따가움이 훅 느껴지는 그런 목소리.  


“너는 왜 좋아하는 것이 없어?”, “배우고 싶은 것도 없어?”, “잘하는 게 왜 하나도 없어?”


나도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고, 뭐든 배우고 싶었고, 잘하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늘 답답했고 움츠러들었다. 책을 좋아했지만 내가 읽고 있는 책들(특히 명랑소설)을 엄마는 싫어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책만 읽는 아이로 찍히기만 했을 뿐이다.

<수학에 빠진 아이>에는 귀여운 빨간 곱슬머리를 한 여자 아이의 가족이 등장한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일이 있어 보인다.

아빠는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고

엄마는 온갖 곤충 연구에 푹 빠져 있고,

오빠는 음악과 악기에 푹 빠져 있다.

그렇게 뭔가에 ‘푹 빠져 있는 상태’를 옆에서 보던 아이는 자신에게 딱 맞는 것을 찾기 위해 학교에 가서 마술, 그림, 발레, 요리, 노래, 테니스, 태권도 등 여러 가지를 경험해 보지만 쉽지가 않다.

그러다 아이는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수학’이다.

수학에 눈을 뜬 아이는 언제 어디서나 좋아하는 ‘수학’을 발견하게 된다.

공원 나무를 보면서 프랙털의 구조를 찾아내고, 놀이터의 놀이기구에서 여러 가지 도형들을 발견하고, 호숫가에서 물수제비를 뜨며 동심원을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찾고 열중하고 싶은 것을 찾은 아이의 마음을 감히 상상해 본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좋아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밥을 먹지 않아도 속이 든든한 마음이 아닐까? 또는 추운 겨울날 장갑을 끼지 않아도 손이 시리지 않은, 뭐 그런 거??

나는 그림책 속 아이가 누가 옆에서 재촉하거나 핀잔을 주어도 조급해지지 않고 당당하게 시도할 수 있는 그런 여유로움이 부러웠다. 그리고 이 곱슬머리 여자아이의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이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을 것 같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지 못했고, 재능을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를 구차하게도 엄마 아빠의 불화 속에 움츠러들어서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나를 놓아버리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나 같이 어찌할 바를 몰라 엎드려 있는 사람이 있다면 위로를 하고 싶다. 내가 그림책을 통해 들었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다. 지금이라도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보라고, 분명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위로와 응원의 목소리를.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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