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살아있는 모든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래서 아름답다.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
조화를 사서 꽃병에 꽂아 둘까,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그날 저녁 꽃병에 꽂은 것은 생화였다.
조화는 효율적이다.
한번 사 두면 일년이고 이-삼 년이고 쓸 수 있겠지.
투자 대비 최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화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살아있기 때문에.
자본주의 21세기. 현대인들은,
인간적이어야 할 삶조차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한다.
느긋하게 명상하고 차 마시는데
1-2시간을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은 없다.
현대인들은 바쁘니까.
빨리빨리 움직여서
투자 대비 최대 효율을 뽑아내야만 하니까.
인풋을 넣으면 바로 아웃풋이 나오는 것.
그것이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삶이다.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들에겐 결과론적인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고등학생 때, 수능 공부를 할 때 맨날 했던 생각이 있다.
"아, 밥 안먹어도 배부른 알약이 있었으면 좋겠다."
중학생 때, 국어 선생님은 매번 쪽지 시험을 쳤다.
이전 시험보다 성적이 떨어지거나,
동일해도 발바닥 매를 맞았다.
나는 늘 맞을 수 밖에 없었다.
주로 올백을 맞았으므로.
그런 나의 발바닥을 때리며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만하지 말고 더 열심히 하라고 때리는거야."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질문했다.
"선생님, 모르니까 학교에 와서 배우는 거
아닌가요? 모르는 건 나쁜게 아닌데, 왜 맞나요?"
선생님의 대답은 간단 명료했다.
"잡소리 하지말고 들어가."
나는 그렇게 컸다.
기계로 컸다.
어른들은 생각을 하지말라고 했다.
조금만 생각하거나 다르게 이야기 하면
“잡소리"라고 했다.
연애나, 우정은 쓸데없는 거라고.
우선 지금은 성적을 올리는데에만 집중하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효율성과 생산성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기계로 27년을 살았다.
나는 연애조차 '자본주의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give'가 가면 'take'가 오는게
당연한거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속도가 나거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답답했다.
데이트 계획을 세울때도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가 있을까가 아닌,
어떤 경로가 가장 효율적일까를 먼저 고민했다.
그러다 나의 학교 생활에, 회사 생활에 연애가 지장을 주기 시작하자, 연애가 귀찮아졌다.
'내가 뭐하러 1시간이나 걸려서 쟤를 만나야 하지? 아, 내일 아침 일찍 출근해야하는데. 바쁜데.'
'쟤랑은 성격이 안맞고 어자피 헤어질꺼 같은데, 지금 헤어지자.'
나에게 연애는 쾌락이었을 분, 행복은 아니었다.
연애가 행복이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연애는 돈과 시간을 잡아먹고, 나의 생산적인 삶을 방해하는 도구라는 생각이 기저에 늘 깔려있었다.
그래서 많은 밤들을,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 속에서 보내면서도,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
더 일에 매달렸다. 그렇게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고, 밤마다 어둠 속으로 나를 침잠시켰다.
많은 밤들이 지나고, 27살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나는 인간이 아니었구나. 스스로를 기계로 만들어버렸구나.'
그제서야 주변이 보였다.
내가 한심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
'덕질을 왜해? 어자피 가수는 알아주지도 않아.' 생각했었는데.
'동물을 왜 키워? 살림살이에 보탬 하나도 안되는데.' 생각했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러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겠다.
지식은 가르칠 수 있으나, 지혜는 가르칠 수 없다.
지혜를 얻으려면 스스로 세상에 몸을 내던지고 온몸으로 직접 느끼는 수 밖에 없다.
책으로 백날 '사랑은 아름다워' 하는 내용을
읽고 또 읽어도,
밑줄을 치고 형광펜을 치고 달달 외워도,
결국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제, 세상에 내 몸을 내던질 것이다.
비효율적인 일들을 잔뜩 해야지.
조화 대신 생화를 살 것이고.
아침마다 명상을 30분 씩 할 것이다.
정성들여 아주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 맛있는 밥을 대접해야지.
그리고 사랑을 해야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위해, 공부해야지.
서툴러도 괜찮아. 아파도 괜찮아.
그 사랑이 영원하지 못해도, 괜찮아.
사실은 모든 게 다. 정말로. 괜찮아.
내일은 화분을 하나 사서 씨앗을 심어야겠다.
내일 씨앗이 죽더라도,
오늘 볕을 쐬어주고 물을 주자.
그렇게 살자.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
성격이 비생산적인 사람들은
주는 것을 가난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들 대부분은 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준다는 것을 '빼앗기는 것' '희생하는 것'으로 오해한다.
생산적인 성격의 경우, 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주는 것은 잠재적 능력의 최고표현이다.
준다고 하는 행위 자체에서
나는, 나의 힘, 나의 부, 나의 능력을 경험한다.
고양된 생명력과 잠재력을 경험하고
나는 매우 큰 환희를 느낀다.
때문에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더 즐겁다.
자기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자이다.
준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만들고,
두 사람 다 생명을 탄생시키는 기쁨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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