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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예영하는 오드리 Oct 05. 2022

문학과 예술의 기묘한 만남4

4. 주제 가라마구 +에드바르트 뭉크 =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4. 주제 사라마구(눈먼 자들의 도시) + 에드바르트 뭉크(절규) =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다    

2022년 7월 29일 0시 현재까지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8만 5,320명, 누적확진자수는 1,962만 517명으로 질병관리청 중앙방역대책본부에서 발표했다. 재원중 위중증 환자는 234명, 사망자는 35명으로 누적 사망자는 2만 4,992명(치명률 0.13%)이라고 한다.

이제는 이런 숫자에 둔감해질 정도로 이력이 나 있지만, 얼마 전까지 이 뉴스에 촉각이 곤두서서 외출을 못할 정도였고, 우리의 앞길을 멈칫거리게 한지도 벌써 2년 반이나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도 코로나 바이러스와 그 변이 전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 이상 입이 아플 정도로 코로나 트라우마는 우리의 일상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고, 특별하게 좋은 것도 특별하게 싫은 것도 없는, 우리를 어쩌면 회색지대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는 가상의 도시 전체에 ‘실명’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수면 위로 드러나는 본능만이 남은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비참한 현실은 실질적으로 눈을 멀게 되었다는 충격보다 이들이 점점 이기적 본성만 의지한 채 최소한의 인간적인 품위마저 내려놓게 되는 자신과 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방적인 강제 격리조치를 취하는 정치인들과 수용소에 강제 격리된 채 자신의 욕심만 챙기는 이기적 욕망만이 남아 있는 눈먼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제압하기 위해 총격을 남발하는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 총체적 위기 상황에 통제불가능한 폭도들과 범죄들이 펼쳐진다. 코로나라는 보이지 않은 바이러스를 온몸으로 경험한 우리도 실명된 채 그 현장을 마주한 듯, 섬세한 심리묘사와 긴장감을 압도하는 필력으로 우리를 이끈다. 물론 이 소설이 한 때 인간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 속에서 본능적인 한계만을 드러내는 현실을 비판만 하려 하지 않았다. 이기적인 본능에서 벗어나 우리 스스로 정화하려는 노력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보게 하는 눈을 되찾게 해준다.     


코로나 발병 초기에 우리나라가 의료진들의 지시에 따라 철저하게 방어수칙을 지키고, 의료진들의 노고에 감사하면서 환자들의 쾌유를 바라고, 한마음으로 신속하게 대처해 온 우리 K방역의 힘을 다시금 떠올린다. 이는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처럼 의사와 공무원, 기자, 종교인, 정책결정자들이 한마음으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면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며 연대하려는 노력이 진정한 인간다움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여주는 것이리라.      




이런 불가항력적인 질병이나 재난을 미리 온몸으로 체험하고 표현해낸 한 화가의 예술작품이 떠오른다. 19세기 말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결핵으로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으며, 화산 폭발로 인한 붉은 핏빛 하늘과 검푸른 해안을 보고 하얗게 비명을 질러댄 자화상을 그린 화가, 바로 에드바르트 뭉크이다.      

1863년 에드바르트 뭉크는 노르웨이의 뢰텐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가난한 의사인 아버지와 예술적 재능을 가진 어머니, 누이 셋과 남동생 한 명과 함께 자랐다. 뭉크가 5살 때 결핵으로 어머니가 죽자 깊은 슬픔에 잠겼고, 의사인 아버지도 그녀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무력감으로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뭉크가 14살 때, 그나마 어머니 대신으로 집안을 돌보며, 그녀의 빈자리를 채웠던 누나 소피마저 같은 병으로 죽게 되자, 그는 병과 죽음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게다가 자신도 병치레가 잦을 정도로 허약 체질이었기에 늘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가까이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이 병약한 그를 신경쇠약증에 시달리게 했으리라. 

<뭉크_절규_1893>

그림<절규,1893년>에서 해골 얼굴로 절규하는 인물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대중매체에 오마주와 패러디되어 우리에게 큰 영감과 충격을 준 유명한 그림이다. 

뭉크의 그림에서 그의 심리가 절로 읽히는 걸 보면 그에게 인생의 대부분이 상실이라는 상처와 두려움으로 점철된 히스테리적인 심리상태가 오히려 그의 예술의 원동력이 된 건 아닐까? 분노, 절망, 공포의 감정 표출만이 자신을 구원해낼 것이라 생각한 듯, 그의 작품<절규>에서 혼이 나간 남자에게 자신을 투영한 광기어린 표정과 어지러운 뒷 배경묘사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어머니와 누나의 병에 의한 죽음과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괴팍해진 아버지와 그에게 정서적 학대를 받은 동생들, 여동생의 정신병원 입원 등등. 뭉크의 삶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그의 편이 아니라 늘 슬픔과 고통만이 그를 따라 다닌다는 트라우마에 사로잡혀 거친 공포의 감정들을 작품 곳곳에 발산해냈다. 

    

이 그림은 뭉크의 머릿 속에서만 탄생한 공포와 충격의 장면이 아니라, 당시 화산 폭발 재난으로 실제 노르웨이의 하늘을 재현해놓은 것이다. 1883년 인도네시아 크리카타우섬에서 대규모 화산폭발로 3만 6천명의 희생자가 발생했으며, 이 폭발로 노르웨이의 하늘에 많은 화산재들로 인해 평소보다 유난히 붉은 핏빛 노을이 1884년 2월까지도 계속 되었다고 한다. 뭉크는 노을을 ‘피묻은 혀’라고 표현하며 핏빛 진한 빨강과 일렁이는 노랑, 검푸른 색으로 강렬한 색채 대비해서 나타내었다. 그는 어느 날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연의 절규를 듣고 도저히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절규의 남자가 지금의 우리를 향해 거대한 파괴력을 지닌 핵폭발로 인해 순간 멈춤으로 모두 연기가 되어 사라질 일촉즉발의 상황을 재현해낸 것이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요동치는 노을과 어지러운 해변가, 그리고 벗어나고파 꼬불꼬불 몸부림치는 물결은 곧 엄청난 충격음을 내며 모두가 분해되어 해체되는 재난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보여주는 것이랄까.

예상치 못한 핏빛 하늘을 보면서 곧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온몸으로 절규하고 있는 저 인물이 어쩌면 3년째 자연이 내린 바이러스와의 전쟁에 전세계적으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던 우리의 절망을 대변하는 건 아닌지 씁쓸함이 밀려온다.


그러다가 발견한 <태양,1909>에서 이 그림이 진짜 뭉크의 작품인가? 한번쯤은 의심하게 된다.

50대인 뭉크에게 대반전의 기회가 생겼다. 오슬로 대학교의 주문을 받아 봄의 첫 해를 바라보며<태양> 작품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간 그의 삶에 내재되었던 불안과 두려움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 드디어 눈부시게 찬란한 태양빛으로 온몸을 광합성을 하듯 그 온기를 그려낸 것일까. 

과거의 묵은 고통과 공포의 감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듯 태양의 벅찬 기운을 받아들이게 한다.     

<에드바르트 뭉크_해_1916>

뭉크는 평생을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았지만 50대가 되어서야 내재된 부정적 감정들에서 벗어나 살아야 할 이유를 긍정하게 된 듯 하다. 이때부터일까? 그는 톨스토이처럼 인생 후반부에 회심의 결과로, 죽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의 우려와는 달리 80세까지 장수하면서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한다.

결국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트라우마와 히스테리는 사라지고, 평안과 행복으로 수명도 길어지는 놀라운 사실을 뭉크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공포와 광기가 가득한 상황에서도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공감하고 도와가면 이 위기는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우쳐준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면서 인간들은 살아야할 이유를 되찾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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