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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작가 Oct 12. 2023

을의 마음


마음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기꺼이 ‘을’이 될 때가 있다. 바로 나의 두 아들과 마음을 나눌 때이다. 엄마가 된 이후로, 내가 가장 궁금해하고 관심을 쏟는 건 두 아들의 마음이다. 내 마음보다도 더 신경 쓰고 이해하려 애쓰며 살고 있다. 이렇게 내 마음을 써가며 누군가의 마음을 알아주려고 발버둥 친 적은 없었다. 

살아가는 동안 크고 작은 고난을 겪을 때, 엄마인 나에게만큼은 다 털어놓고 기댈 수 있으면 좋겠다. 이해받고, 공감받고 있다는 걸 느끼면 적어도 나에게는 기댈 수 있지 않을까?


며칠 전, 친구가 속상하다며 하소연을 해왔다.

“나는 XX 마음을 알아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고, 그래도 꽤 잘 알아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아이 마음 알아주고,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100프로 마음을 알 수는 없을 거야. 들여다본다고 보이면 모를까. 게다가 우리는 엄마니까. 이해해 주려고 노력은 하지만, 걱정되는 마음에 결국 잔소리하게 될 때가 많잖아. 자기 마음 몰라준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같아. 울지 마 친구야.”

아이와 마음을 나누는 데에 있어서 ‘을’의 입장인 건 나뿐이 아닌 듯하다.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들의 마음은 이해되지 않을 때가 많다. 철저히 을이 되어, 내 사고방식을 배제하고서라도 이해하려 해도 쉽지 않다. 이 녀석이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친정엄마가 사춘기였던 남동생에게 “주먹이 운다, 울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딱 그 심정이다. 주먹이 운다, 정말! 

아들이라서 더 이해할 수 없는 걸까? 남편이 살아있었다면, 아빠가 같은 남자로서 이해하고 공감해 줄 수 있었다면, 질풍노도 속에서 아이가 덜 흔들릴 수 있었을까? 나에게 남편이 없는 건 이제 괜찮아졌지만, 아이들에게 아빠가 없는 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속이 터질 듯 답답해도 참다가, 열 번에 아홉 번은 참다가 한 번 잔소리하면 어찌나 격한 반응이 오는지. 며칠 전에는 잔소리했더니, 

“나를 좀 내버려 둬! 참견하지 말고!”

라며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목청껏 말했다.

“엄마한테 버릇없이 말하지 말라고 했지. 선은 넘지 말아야지.”

얼굴이 새빨개졌던 아이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엄마가 말하지 않아도 나도 다 안다고! 내가 너무 힘들어 요새. 사춘기인가 봐, 원래 그런 시기라며.”

평소에 안 우는 녀석의 눈물을 보자 순식간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이에 대한 불만, 걱정보다 미안함이 앞섰다. 내가 아이 마음을 더 이해해 줬어야 하는데…… 방으로 들어가 혼자 훌쩍이다가,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다시 아이에게 갔다. 

“너 힘든 거, 네 마음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에 아이는 반항적인 눈빛을 거뒀다. 그러더니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나도 매일 밤 자기 전에 기도해. 내일은 엄마한테 더 잘하게 해 달라고.”

이 녀석, 내 마음을 알아주고 있던 걸까?      


“결국 내가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지인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수정 씨는 잘못 없는데도 매번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하네요.”

라고 했다. 사춘기 아이의 모습에 답답하고, 화나고, 아이가 미워질 때도 있다. 큰 소리 내며 싸우기도 하고, 모진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매번 내가 잘못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아이의 마음을 더 알아주지 못해서, 더 사랑해주지 못해서, 따뜻한 말 대신 뾰족한 말을 내뱉어서, 그래서 미안하다. 


늘 미안하고 또 미안한 나는 ‘을’이다.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잔소리를 덜 하기 위해, 더 많이 사랑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내 마음을 아이들이 몰라줘도, 모르는 체해도, 기꺼이 두 아들의 ‘을’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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