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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규 Aug 05. 2021

살 수 있다는 거짓말

출혈

밤 12시 조용하던 병동에 큰 소리가 들린다. 

' 선생님! 여기 환자 분 좀 빨리 봐주세요!'


병동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던 중 한 간호사가 다급히 나를 찾았다. 나는 오프(공식적으로 일을 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공포에 질린 얼굴을 보니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달려간 병실에는 앙상하게 마른 할머니 환자가 입과 코로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핏줄기의 일부는 동맥의 강력한 압으로 천장을 향해 치고 있었고 그 옆에는 석션(액체 등을 빨아들이는 기계)으로 어떻게든 대처해보려고 시도하는 다른 간호사 한 명이 사투를 버리고 있었다. 이미 많은 피를 순식간에 흘린 듯 침대는 피로 다 젖어 있었다.


'응급상황'


나는 움직여야만 했다. 오전 회의 시간에 나왔던 환자가 이 환자일 것이란 생각이 바로 들었다. 출혈의 의심부위는 경동맥. 그냥 두면 과다출혈로 인한 저혈량 쇼크로 몇 분이면 돌아가실 것이 뻔했다. 몸에서 몇 L의 피가 순식간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원인데 대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면 쏟아지는 피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막아야만 했다. 

"환자 처치실로 빼고, 당직 선생님들 다 깨워서 모아요!"

혼자 절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손이 필요했다. 


각종 처치 기구들이 있는 병동의 공간으로 순식간에 환자를 옮기면서, 모든 것이 매트릭스처럼 멈춘 시간을 

잠시 느꼈다. 머릿속엔 빠르게 환자의 ct가 떠올랐다. 경독맥의 파열은 곧 죽음이라고만 생각해왔기에 다른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치료법이 아닌 버티는 방법이었다. 

'손을 넣어 출혈부위를 잡을 수 있을까?' 예상 부위는 입안 쪽으로 깊숙한 곳이었다. 불가능했다. 그러나 시도는 해봐야 했다. 살려야 했다. 나는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환자의 입속에 넣고, 엄지 손가락으로는 경동맥의 기시부를 누르며, 강하게 압박을 시작했다. 환자는 고통에 입을 꽉 다물어 내 손가락을 깨물었다. 내 살 속으로 파고드는 고통보다 할머니가 느끼는 고통이 더 클 것이었다. 잘리지 않는 한, 눌러야 급사를 막을 수 있기에 버텨야 했다. 그러나 한쪽 머리로 가는 혈류를 손가락으로 막아버렸기에, 장기적인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나는 환자의 손을 잡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살 수 있어요. 이것만 우리 넘겨요. 살 수 있어요!"

 환자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그 앙상한 얼굴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살 수 있다는 말 때문이었을까? 조금은 내 손가락에 들어간 이빨에 힘이 빠졌다.


내 오른손은 할머니를 살리고 있는 동시에 죽이고 있었다. 대량 출혈을 막아 버틸 시간을 주었지만 한쪽 뇌는 충분한 피를 받지 못해 대미지를 받고 있을 것이다. 어디가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 알 수 없었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살아는 있어도 죽은 몸이 될 수 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급한 피는 내가 막았지만, 어디가 터졌는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환자의 입안에 손을 넣은 채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급하게 부탁해 얻어낸 혈관조영실로 침대를 끌었다. 달려가는 중에도 계속 말했다. "할머니 살 수 있어요!... "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환자는 힘을 얻는 듯했다. 그 표정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타들어 갔다.

혈관 조영술이 시작되었다. 화면에 하얀 조영제가 혈관을 타고 올라가 손상된 부위를 보여주었다.

동맥의 흐름이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뉘는 길목에 조영제가 유출되는 것이 보였다. 누구라도 자신 있게 시술하겠다고 나설 수 없는 부위였다. 교수님들은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병동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새벽 4시, 회의를 하는 동안 반복되는 출혈을 손으로 막으며, 혈관으로는 충분한 수액과 피를 주며 버텨내었다. 수술을 시작할지, coiling(혈관 안에 색전 물질을 넣어 혈관을 막는 시술)을 할지에 대한 긴 토론의 결론은 Coiling이 되었다. 시술이나 수술 둘 다 환자가 사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보호자에게 설명해야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할아버지는 나에게 할머니를 살려만 달라고 울부짖었다. 상황에 대한 이해? 누가 이런 사태를 이해하고 동의한다는 말인가. 동의서에 사인을 받아내는 나는 또 죄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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