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이 있다. 자신이 죽은지도 모르는 한 의사가 피범벅이 된 가운을 입고 환자를 확인하며 응급실로 들어간다. 수술실이 준비됐냐는 의사의 외침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뒤를 비추어 하얀 가운 뒤의 검은 저승사자를 보여준다.
"저 죽었나요?"
"**년 **월 **일 **시 사망, 사인 과로사. 선생님의 처치 덕분에 저 환자는 살았습니다."
"다행이네요."
쓸쓸한 걸음으로 의사는 사라진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 환자를 살린 사람의 최후가 이렇게도 씁쓸할 줄이야. 이 의사에 희생에 보는 이들 모두가 마음 한편이 시렸을 것이다.
설날 당직. 한 해의 시작은 평온해야 맞지만, 늦은 밤부터 시작된 '코드 블루' 방송은 새벽을 넘어서까지 두 번이나 연속되었다. 내 가운도 튀는 피와 땀에 젖었다. 말 그대로 탈진했다. 하프코스 마라톤을 뛴 듯 숨 쉴 힘만 남아 있는 녹초가 된 채로, 새 아침이 밝아버렸다. 재활의학과 환자들은 재활 프로그램 일정이 있어 정해진 시간에 소독을 꼭 받아야만 했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그대로 몸을 억지로 끌고 소독 카트를 밀며 병실을 돌았다.
휴일에는 그동안 못 보았던 가족들을 보러 온 처음 마주하는 환자의 가족들이 있었다. 대부분 잘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들었지만 어떤 분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인사도 받지 않았고, 쭉 나를 쏘아보는 눈빛으로 보았다. 나는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고 커튼을 닫고 나와 조용히 다른 환자가 있는 커튼을 열고 자리를 옮겼다. 그때부터 뭐가 불만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보호자는 내가 같은 방에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일부러 들으라고 한 말일 수도 있겠다.) 내 욕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렇게 씻지도 않고 더러운 사람이 의사라고... 작은 것 하나 뭐 제대로 하는 게 있겠어요? 머리도 안 감은 것 같은데 더러워서 정말.." 모멸하는 말들이 줄을 이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욱하고 올라왔다. 피땀이 묻은 가운은 벗어 놓은 채 일했지만, 묻은 땀냄새와 씻지 못한 머리는 감출 수가 없었다.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화를 식혔다. 들었던 말들이 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 누군가는 내 모습을 그렇게만 볼 수도 있겠지' 했지만... 이러려고 의사가 되었나 회의감마저 들었다.
나의 과로가 내 의사 생활을 죽인 기분이었다. 그 보호자는 끝내 병원에 민원을 넣었고, 누군가 나를 향해 민원을 넣었다는 것을 진료과를 통해 듣게 되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싫었다.
'도깨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다른 엔딩으로... 내 뒤의 보호자는 다른 저승사자가 되어 나를 죽였다. 이 사람도 '도깨비'의 이 장면을 보았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업무가 종료된 후에 가장 먼저 샤워를 했다. 머리부터 물을 내리 흘리며 씻어 내렸다. 귀에 묻은 말이 씻기지 않는다. 아무 죄 없는 환자마저 미워지려 했다. 결국 그 병실은 동기에게 부탁했다. 씻지 못한 잘못을 정당화시킬 생각은 없다. 그러나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굳은 표정으로 수련을 받고 있는 젊은 의사들이 당신의 심장이 멈추면 제일 먼저 뛰어갈 사람들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