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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방인 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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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팔구년생곰작가 Jun 03. 2024

숨결






그녀의 집 근처에 위치한 술집에 자리했다. 평소처럼 그녀는 나를 보며 호기심 반 호감 반인 듯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방긋 웃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사내 연애 중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그녀도 이번 공장의 사고를 모를 리 없었다. 내가 사고 피해자의 절친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을 텐데."

"나 솔직히 많이 걱정됐어."

"네가 정신적인 충격이 컷을 것 같아."


"그렇지." "조금 힘들긴 해. “

"일에 집중하는 것도 그렇고, 그냥 고향에 내려갈까 생각 중이야."


"그렇구나."



사실 이번 사고를 통해서 느낀 점이 많았다. 그리고 친구의 죽음을 목격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과 무력감 때문에 심적으로 힘들었다. 다시 고향에 내려가서 새로운 삶을 계획할 까 고민하던 차에 그녀에게 이러한 생각들을 무심코 말해버리고 말았다. 고향에 내려간다는 것은 그녀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렇구나." "네가 결정하는 것이니, 내가 뭐라고 말하기가 그렇네."

"아무튼 잘 결정해."

"여기가 정답은 아니야, 하지만 지금까지 일 잘해왔잖아."

"조금 더 일하면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길도 열릴 거야."


"고마워." "여러 가지로 고민해 볼게."

"하지만 당장 우리 사이가 멀어진다거나 뭐 헤어지자고 하는 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하하... 바보."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해."



술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갑자기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나를 초대하였다. 사귀던 여자라고 하여도 여자가 사는 집에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에게 정중하게 거절하려고 하였으나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녀가 걱정되어 집 앞까지는 바래다 주기로 하였다.



길 앞에 지나던 택시를 멈춰 세우고 그녀를 택시에 태워 집으로 함께 향했다. 첫 만남에서는 내가 술에 약한 모습이었는데 이번에는 오히려 내가 술이 쌔진 걸 보니 나도 어엿한 사회인이 된 모양이다. 집으로 가는 동안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술에 깊이 취한 건지 그녀는 택시 안에서 어떠한 미동도 없이 나의 어깨에 기댄 채 쌔근쌔근 잠이 들어있었다. 그녀의 새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향수냄새 그리고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어느새 택시가 멈춰 섰다. 그녀의 집은 대학가에 위치한 작은 빌라였다. 택시에 내려서 그녀를 집에 데리고 가려는 찰나에 갑자기 그녀는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자기야 집에 가서 2차 더 하자."



그녀는 캔맥주를 여러 개 집어든 후 계산대에 놓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계산대 앞에선 나는 점원과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쩌다 보니 계산은 나의 몫이 되어버렸다.



"후, 어쩔 수 없지. 일단 집에 가서 조금 있다가 슬쩍 빠져나와야겠다."



그녀를 따라 집에 들어오니 화장품과 방향제 냄새가 가득했다. 내가 지내던 기숙사 그리고 남자들이 사는 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향기였다. 외투를 벗어 거실 소파에 걸쳐 두었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자기야 잠깐 있어봐, 외투만 벗고 올게."


"응 천천히 하고 와."



그녀가 방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그녀의 가족사진과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커다란 투명 창을 덮고 있는 하얀색 커튼 아래에 그녀가 키우는 화분이 놓여 있었다.  


 

비틀거리며 자신의 방에 들어갔던 그녀는 외투만 벗어던지고 다시 거실로 나왔다.



"피자에 맥주 어때.?"

"어제 먹으려다가 못 먹은 피자가 있는데."

"괜찮지.?"


"응, 아무거나."



따뜻하게 데워져 있는 피자와 캔맥주를 기울이며 그녀와 2차를 하였다. 한참을 술을 마시다 보니 나도 술기운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이쯤 해서 집에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러던 찰나에 갑자기 나의 어깨에 기댄 그녀가 자신의 입술을 나의 입술에 포개고 있었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시간이 너무 늦었잖아."


"응 무슨 소리야, 이제 집에 가야지."


"바보, 알아서 해."

"나는 씻으러 간다."



그녀는 갑자기 나에게 자고 가라며 통보를 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한참을 씻고 나온 그녀는 수건만 몸에 걸친 채 방으로 향했다.



"아직 안 갔어.?"

"자고 가려면, 얼른 씻든지."


".... 네 알겠습니다."



나는 후다닥 욕실로 향했다. 옷을 벗고 따뜻한 물에 몸을 맡겼다. 씻으면서 우연히 세면대를 보니 칫솔이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그녀 혼자 사는 게 아니었다. 혹시 나 말고 만나는 사람이 또 있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고 있었다.



욕실을 나와서 남은 맥주를 마저 먹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신의 방에 들어가 있었다.



"맥주 더 먹으려고.?"

"나 너무 피곤한데."

"너 더 먹으려면 먹어, 나는 이제 잘래."



반쯤 문이 열려 있는 방 안에서 그녀가 뒤돌아서있었다. 투명한 원피스만 입어서 그런지 그녀의 하얀 피부와 속옷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나보고 맥주를 마시라는 건지 잠을 자라는 건지 참."

"나는 거실에서 잘게."

"베개랑 이불 좀 줘."


"웅 여기 있어."



갑자기 그녀는 퉁명스럽게 베개와 이불을 던져주고는 침대에 누워 버렸다. 맥주는 그만 마시고 잠이나 청해볼까 하며, 소파에 기대어 이불을 덮었다. 그러나 그녀의 원피스를 입었던 뒷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에 조용히 들어왔다.



"어맛, 깜짝이야.!"

"뭐 해.?"


"아니 뭐, 소파에서 자려니 좀 춥기도 하고."

"너 어깨 배게 좀 해줄까 하고."


"뭐...... 바보.!"

"자려면 같이 자도 돼."

"그런데 뭐 손만 잡겠다고 하려는 건 아니지.?"


"하하 그러려고."


하지만 나의 의도와는 다르게 어느새 그녀와 격정적인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침대 안에서 뜨겁게 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그녀를 안고나면 분명히 순수한 사랑의 마음은 식어 갈 것이다. 나는 뜨겁게 안았던 그녀를 멀찌감치 떨쳐내고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으려 하였다.



"뭐.... 뭐 해.?"

"갑자기.?"


"아니, 우리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급하게 관계를 가지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

"널 더 아껴주며 사랑하고 싶어."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나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며 이해를 하려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의 손을 뿌리치며 뒤돌아 누운 그녀는 조금은 화가 난 모양이었다. 문득 2년 전 짧은 연애를 하며 만났던 어떤 여자아이와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 여자아이와도 관계를 할 수 있었지만 끝내하지 않았다. 아껴준다는 나의 말에 공감하지 못한 그 여자아이는 매몰차게 나에게 이별을 통보하였다. 왜 갑자기 이 상황에서 이 시점에 가슴 아픈 과거가 떠오른 걸까.



“욕실에 칫솔 여러 개 있던데 나 말고 또 누구 만나고 있는 건 아니지.?”


“미쳤니.?! 나랑 같이 사는 룸메이트 언니 거야.”

“오늘 야근이라 집에 없어.”


“그래.”



나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 나의 입술을 포개었다. 그녀의 몸 전체를 휘감고 만지기 시작하였다.



"왜 그래, 잔다며.?"


"아니 내가 잠깐 딴생각한 것 같아."

"그냥 너 오늘 안을래."



그녀와 하나가 된 순간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과거와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바보처럼 놓쳐서는 안 되겠다. 누군가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뺏기는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그녀를 더욱더 격정적으로 끌어안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순간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가 내려앉았다.



어느샌가 그녀는 나의 팔에 기대에 쌔근쌔근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다시 느껴졌다. 깊은 밤 그녀와 한 몸을 이룬 후 조용한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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