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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Oct 25. 2024

아르코창작선정작/위장의 기술2

<단편 소설>

  2.

  퍼스널 룸 통로로 카트를 밀고 들어갔다. 룸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허리를 펴고 숨을 몰아쉬었다. 룸으로 이어진 통로는 좁고 비밀스러웠다. 마치 1% VIP들만의 성처럼 화려하고 은밀했다.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이곳에선 얼마나 많은 비밀이 생성될까.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비밀이야말로 진짜 비밀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크를 하자 허 실장이 안으로 물건들을 들여오라고 했다. 룸 안의 오렌지빛 조명이 장식장 유리 곳곳에서 반사된 빛이 눈부셨다. 3인용 소파 뒷벽에는 추상화 네 점이 걸려 있었고, 소파 앞 탁자 위에는 명품 홍보 책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붉은색 벨벳으로 감싸인 3개의 의자는 황금빛 부드러운 곡선 테두리가 장식되어 고풍스러우면서도 디자인이 화려했다. 


  룸에는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판매 상품들이야. 건드리지 않게 조심해. 선애 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 실장은 중요한 통화인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피팅실로 갔다. 유리 진열장 곳곳에 다양한 소품들은 모두 진열된 상태였다. 나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뛰어난 컬러 감각을 허 실장에게 어필하고 싶었다. 슈트 케이스를 열고 가죽 트렌치코트와 트위드 재킷과 버튼 재킷 등 여러 종류의 의류를 행어에 차례로 걸었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디자인에서 평범한 고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애 언니는 나를 데리고 물건을 공수하러 갈 때마다 코코 샤넬의 말을 강조했다. VVIP 고객들은 상품보다 계급을 중요시해. 그러니까 각각의 고객마다 최상의 대접을 받는다는 인상을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요즘엔 비용과 상관없이 희귀상품에 목을 매는 시대라고 했다. 수억 원대 상품도 우습게 아는 고객들이 이삼십만 원대 한정품 운동화 상품을 구하려고 암투를 벌이는 심리는 뭘까? 그때는 선애 언니가 오버한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박스를 열어 시폰 원피스를 꺼내려는 찰나, 허 실장의 절제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함부로 만지면 위험하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단단하고 뾰족한 것이 날아와 박힌 것처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스크에 가려 표정은 읽기 어려웠지만 싸늘한 눈초리와 갈라진 목소리에서 비난이 느껴졌다. 공수만 해 오랬지, 아무나 포장을 뜯어도 되는 물건이 아닌 거 모르나? 가끔 선애 언니를 도와 제품 포장을 뜯고 디스플레이도 했다는 것을 허 실장이 모를 리 없었다. 허 실장은 내 손에 들린 옷을 가져다 조심스럽게 행어에 걸었다. 고리 모양의 장식이 시폰 원단을 풍성하게 만드는 디자인이었다. 장갑도 안 꼈네. 귀하게 모셔야지 손때라도 묻으면 어쩔 거야. 내 입에서 죄송하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허 실장은 부드러운 말투로 위장했지만, 평소보다 유난히 예민하고 까칠했다. 선애 언니 다이어리를 쉽게 건네주지 않은 내가 신경을 거슬리게 했을지 몰랐다. 허 실장은 내가 진열한 상품들을 재진열했고, 나는 빈 포장지를 박스에 정리하며 눈치를 보았다. 금세 침착해진 허 실장은 고객이 드실 간식 목록을 카톡으로 보낼 테니 고객이 도착하기 전에 구해 오라고 했다. 


  직원 전용 통로를 지나 창고로 갔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잊고 있던 아랫배 통증까지 몰려왔다. 퇴근 시간까지 진통제 몇 알을 더 삼켜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창고에 카트를 밀어 넣고 라운지로 뛰었다. 백화점 근처의 호텔 카페에 스테이크 포장을 전화로 주문했다. 그런 뒤 구글맵을 켜 열대 과일 파는 곳을 검색했다. 제철도 아닌 열대 생과일을 바쳐야 하는 고객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라운지를 찾는 고객과 퍼스널 룸 고객은 전혀 다르다고 했다. 타인의 시선을 유난히 의식하는 VVIP 고객들은 룸을 선호할 수밖에 없고, 룸에 들어선 순간 그들의 태도는 달라진다고 했다. 백화점 식품관에도 없는 과일을 어디서 구할지 난감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지옥이라도 찾아가 구해야 하는 것이 VVIP 세계의 법칙이었다. 긴 검색 끝에 택시를 타고 열대 과일 파는 전문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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